충청도

배론성지( 舟論聖地)

浮石 2017. 5. 2. 20:43


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1,087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다. 이곳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다.

1866년 병인박해 전에 배론은 6개 마을로, 즉 아랫배론, 중땀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비득재 마을이 있었으며, 70여호가 있었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집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단체 피정의 집이다.

황사영순교현양탑

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에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한 후 알렉시오(Alexius)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한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나고부터는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17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살면서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번역하는 등 활동적인 교회 지도자로 부상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피신하여 황심, 김한빈, 송재기로부터 박해의 진행사항을 들었고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글 쓰는 일로 소일한다.
그 해 8월 23일 황심으로부터 박해의 소식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사실을 듣고는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백서를 쓰기 시작한다.

황심이 9월15일 체포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으며 백서는 압수된다. 황사영과 관련자들이 순교한 후 백서 사건은 종료되지만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생겨난다. 하지만 한번 전파된 천주교 신앙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빠르고 더 넓게 온 나라 구석구석으로 전파되어 갔다.





성모동굴

배론의 연못


복원된 배론 신학교

한국 최초의 신학교(성요셉신학교)로 사용되었던 바로 그 건물이다. 원래는 장주기(요셉)성인이 거주하시던 집이었으나 후에 신학교 건물로 기증을 하여 여기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정확히 고증하기 어려우나 1930년 정규하 신부를 비롯한 배론 교우들이 함께 찍은 사진1948년 9월 27일 주재용 신부가 작성한 도면 등을 참고로 현 위치에 건축된 성 요셉 배론 신학교는 현재 충북 지방문화제 제 118호로 지정되어있다.

1855년 메스트로 신부는 성인 장주기 요셉의 집에 성요셉신학교(일명 배론신학교)를 세웠다.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등 프랑스인 신부들의 지도 아래 10여 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 학문을 배운 이들이 사제의 길에 들어설 무렵 병인박해(1866년)가 발생했다. 두 신부와 장주기 요셉은 각각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고, 신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다. 


방안에는 무릎을 꿇거나 혹은 꼿꼿이 서서 천주학을 공부하던 당시 신학생들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리고 지금의 건물은 2003년에 복원한 것이다. 초가 형태로 지어진 성요셉신학교를 2명의 신부 동상이 밖에서 늘 지켜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 황사영(알렉시오)순교자의 백서가 쓰여진 장소로서 겉보기에도 보잘것없고 아주작은 공간이 당시의 박해상황을 짐작케 할수있는 우리선조 신앙인의 굳건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영조 51년에 태어나 순조 원년에 순교한 천주교 신자 황사영(1775∼1801)의 백서가 쓰인 토굴

배론의 토굴은 황사영이 내려왔을 당시 옹기 저장고로 위장됐는데, 그는 8개월간을 이 굴에서 숨어 지냈다. 황사영의 백서는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보는 토굴은 1987년 이원순 교수가 고증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이곳 배론으로 피신, 토굴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비극을 중국의 북경 주교에게 호소하는 긴 편지를 썼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다. 이 편지는 발각되고 말았으며, 그는 대역부도죄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은 1775년 당시 유명했던 창원 황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덕소(德紹)다. 어려서부터 총명과 재덕이 남달리 뛰어나서 이미 1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정조대왕이 그를 불러 치하한 후 그의 손목을 붙잡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고 하셨다 한다. 그때부터 황사영은 임금님이 만지신 손목을 붉은 비단으로 감고 다녔다 한다.

당시는 정조 치하로서 탕평의 정책 아래 남인들의 정계 진출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고 정조의 주목을 받은 그는 출세가 보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후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을 한다. 황사영은 결혼한 해에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혼인을 통한 처가 쪽의 영향일 것이며, 장인 정약현의 첫 부인은 이벽(세례자 요한)의 누이였고, 셋째 동서는 후에 순교한 홍재영(프로타시오)이며,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한 이는 이승훈(베드로)이다.
황사영은 영세를 하고난 후부터 세속의 공명과 영화를 뜬 구름으로 여기고 교리 연구에만 열중하며 교회 안에서도 회장직을 맡아 성실하게 이행한다. 후에 정조대왕은 황사영이 과거시험에서 백지를 내는 것을 아시고 대신들을 통해 충분히 공부하여 응시하도록 권유하였으며 또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듣고서는 몹시 슬퍼하며 연민의 정을 나타내셨다고 한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는데 10일 이내로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망명의 길을 떠난다. 수염을 자르고 상복을 입고 2월 15일 서울을 빠져나와 김한빈의 안내로 여주, 원주를 거쳐 제천 배론 교우촌으로 숨어든다. 이웃사람에게는 서울 사는 이씨이고 상을 당한 이(喪人) 라고 하였으며 옹기점 옆에 토굴을 파고, 그 속에서 8개월간을 은거하며 살아간다.

김한빈(베드로)과 황심(토마스)을 외부 연락원으로 교회 소식을 듣곤 하였는데 8월 23일 황심으로부터 주문모 신부가 자수한 후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심을 한 황사영은 북경주교에게 박해의 소식을 알리고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백서(帛書)를 쓰기 시작한다.
9월 15일 황심이 먼저 잡히고 9월 29일 황사영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 그 해 11월 5일 황사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한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소재하고 있다.



배론 신학교(1855-1866년, 주보성인 성요셉) 설립자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 직무대행 메스트로 신부1855년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메스트로 신부는 1808년 프랑스 앙트르몽에서 태어나 1832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이듬해 마카오에 가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10년간의 모험 끝에 1852년 8월17일 중국 배를 타고 서해안 고군산도에 상륙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1853년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사하자 1856년 3월27일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도착 할 때까지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메스트로 신부는 1857년 12월30일 과로로 쓰러져 선종 할때까지 배론 신학교 설립 외에도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는 등 착하고 순한 성격으로 최양업 신부와 많은 조선의 신자들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8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은 신학교를 성요셉 신학교라고 하였다.


성 장주기 요셉

배론본당(성요셉성당)

배론본당은 성지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누각성당이다

진복문(眞福門)

성모자상


최양업신부 기념성당(대성당, 소성당)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삼천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다.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주아(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주아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부아(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데플레슈,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 등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 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부아 신부는(그간 르그레주아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브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브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피로 물든 조국땅을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 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 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재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에서 소유, 관리한다. ‘배론’은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주교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1775∼1801)이 머무르며 백서()를 썼던 토굴과 최양업(:1821∼1861) 신부의 묘가 있으며,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배론성지는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으로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재한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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