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융릉(隆陵)

浮石 2017. 12. 22. 06:00


융릉은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현경왕후(1735~1815, 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이다.

사도세자는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두 번째 왕자다.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다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원자 정호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한 것이다.

왕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해 3세 때 『효경』, 『동몽선습』 등을 익혔고 글을 쓸 줄 알았다. 이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天地王春)'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다투어 세자의 글을 하사해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뻐하며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라며 세자의 재간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세자는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10세 때 당시 세마(정9품)였던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는데 그녀가 혜경궁 홍 씨다. 홍봉한이 당시에 급제하지 못하고 세마라는 말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서야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홍봉한은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 어영대장, 예조, 이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는데, 홍봉한의 승세는 사도세자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자는 영특하면서도 무인 기질이 강했다. 어릴 때부터 반드시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으며, 병서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한다. 또한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16세 때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 이어졌다.

24세 때인 영조 35년(1759)에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해 『무기신식』이라는 책을 엮었을 정도다. 이 책은 훈련도감각주1) 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그 뒤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늘 군복을 입고 다녔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 25년(1749) 15세 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할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영조의 처신이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도 글 읽는 것보다 무예를 중요시하는 데 불만이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에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실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리청정은 훈련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영조도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에 훈련하려는 의도로 대리청정을 도입했다고 평가된다.


영조는 아들을 세자로 명한 후에 이를 양위 파동으로 적절히 이용했다. 왕이 그럴 의사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했고, 국왕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겠다고 고집했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두어졌다.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정치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시기가 매우 부적절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무려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 16년, 20년, 21년, 25년 때로 세자 나이 4세, 5세, 9세, 10세, 14세 때였다.

무엇보다 4~5세의 세자에게 전권을 물려주겠다는 말을 왕이 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양위 파동에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자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영조의 후궁 숙의 문 씨 등이 세자를 무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책하자 그는 화병과 정신병을 얻었다.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동조한 장인 홍봉한은 훗날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병도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했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1761년 정순왕후의 생부인 김한구와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동궁이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관료들과 20여 일이나 무단으로 관서 지역을 유람했다"라는 내용이 적힌 '허물십조'를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 이를 본 영조는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인가"라고 한탄하며 세자에게 명해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후 자결할 것을 명했다.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니 어서 그리하라"라는 나름의 명분도 만들었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자 사도세자는 부모 앞에서 자결하는 것이 효에 어긋난다고 항변했고, 영조는 당시 11세였던 정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도세자를 뒤주각주2) 속에 가두어 죽게 했다. 그런 후 사도(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라는 시호를 내리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그것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내외에 알렸다. 흔히들 말하는 '사도세자'라는 호칭은 이때 생겨났고 이후 사도세자는 비운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그런데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가 『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실록』 38년(1762) 윤 5월 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라는 말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범 편사연구사는 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 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가 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고 첨언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원인으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된다. 우선 『한중록』의 기록처럼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 받은 정신적 압박감과 왕실 내의 미묘한 인간관계로 인해 정신 질환을 가지게 되었고, 살인 등 여러 기행을 일삼다가 불가피하게 단죄를 받았다는 의견이다.


다음은 사도세자가 영조 시대의 정치를 개혁하려는 비범한 자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척족과 일부 노론의 사주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의견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혜경궁 홍 씨는 남편인 사도세자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친정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도세자가 집권할 경우 친정에 큰 화를 불러올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유는 노론을 극히 싫어하는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른 후 그를 극히 반대했던 장인, 즉 홍 씨를 제거했을 때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는 아버지가 반정에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되고 자신도 폐출되었다.

또 하나는 아들인 정조를 위해 남편인 사도세자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영조의 눈에 벗어난 사도세자를 옹호하기보다는 정조를 위해 시간을 버는 것이 유리했다는 뜻이다. 연유는 어떠하든 혜경궁 홍 씨는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보았고 극진히 우대받았다.

물론 홍 씨에게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남편이 서인으로 강등당하고 사망하자 혜빈이 된 홍 씨는 세손(정조)과 함께 사가로 나와 사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영조가 손자인 정조를 10세에 죽은 첫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한 것이다. 홍 씨로서는 졸지에 아들마저 빼앗긴 셈이다. 결국 정조는 왕이 된 뒤 친부모를 추존하지 못하고 양부모인 효장세자와 현빈을 추존해 왕과 왕후에 봉한다.

물론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친모인 홍 씨를 혜경궁으로 올리고 을묘원행의 주인공으로 극진히 모신다. 홍 씨는 순조 15년(1815) 81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융릉에 묻힌다. 또한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정의왕후에서 의왕후가 되었다.

혜경궁 홍 씨는 궁중 문학의 효시로 알려진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융릉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천하의 명당이다. 이 자리는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하는 등 수백 년 간 풍수가들의 주목을 받아온 곳이다. 뒤로는 광교산, 팔달산, 화산이 둘러치고 앞으로는 겹겹이 둘러싼 봉우리들이 좌청룡, 우백호, 안산, 조산을 이루고 있다.

정조는 융릉 조성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정우태를 초빙해 국왕의 위격에 걸맞은 치장을 명했다. 봉분은 난간석을 생략했지만 인조의 장릉 이후 처음으로 목단,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두르고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에는 연꽃을 조각했다. 이는 조선 시대 최고의 연꽃 조각으로 평가된다.

특히 장명등은 조선 초기 팔각 장명등 형태이고, 하부는 숙종 이후 명릉에서 나타난 사각 장명등을 닮은 구름무늬 다리로 만들고, 팔각면에 매난국 무늬를 아름답게 새겨 새로운 양식을 선보였다. 추존 왕임에도 무인석을 세웠고, 석마가 무인석 곁에만 한 마리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문인석은 언제나 사도세자 곁에 있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을 담아 조성한 듯 매우 사실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학자들은 조선 시대 문인석 조각의 백미라고 평가한다.


융릉은 특이하게도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원래 조선 왕릉은 능침이 참배자나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능침과 정자각, 홍살문을 일직선에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다.

정자각이 능침의 가리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융릉은 정자각이 능침 안산 방향에서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래서 수복방이 능침 앞을 가로막았다. 조선 왕릉의 수라간과 수복방이 정자각 앞 신로와 어로를 중심으로 마주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나란히 배치된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 재실에 걸어 곁에서 사도세자를 봉양하는 의미를 두기도 했다. 그만큼 아버지에게 사후에도 효도를 다하겠다는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서울에서 화성까지 행차하려면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모시고 1,7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한강을 건너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원래 왕의 행차가 한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는 것이 관례이지만, 그때마다 수백 척의 민간 배를 징발해 민폐가 매우 컸다.

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 즉 주교를 건설했다.

이 배다리는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이면서 안정성과 미적 감각까지 갖추었다. 큰 배를 강심에 배치하고, 이를 축으로 작은 배들을 남북으로 배치해 완만한 아치형을 이루게 한 것은 오늘날 사장교의 원리와 비슷하다. 특히 동원된 민간 선박에는 못을 박지 않도록 하는 등 세심한 연결 방식을 구사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한강 일대의 지리 조건을 정확하게 습득하고 조수 간만에도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선창을 조교 형식으로 해결한 것은 현대인들이 봐도 놀라운 일이다.



융건릉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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