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국립 민속 박물관 2

浮石 2019. 5. 5. 06:00


방립과 도롱이 그리고 나막신


방립(方笠) : 가는 대오리를 엮어 큰 삿갓 모양으로 만든 모자.


도롱이 : 비가 올 때 입는 옷이다.

안쪽은 촘촘하게 엮고, 거죽은 풀의 줄거리를 늘어뜨려 빗물이 스며들지 않고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나막신 : 진땅에서 신는 신발로, 앞 뒤에 높은 굽이 달려있어 발이 물에 젖지 않는다.


평상 죽부인 합죽선

목침

6. 망건 :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오지 않게 하려고 이마에서 뒤통수에 걸쳐 두르는 것이다.

7. 탕건 : 머리에 쓰는 모자의 일종이다 집안에서는 그대로 쓰고 외출할 때는 그 위에 갓을 쓴다.

8. 사방관 : 망건 위에 쓰는 네모 반듯한 관

9. 정자관 : 평상시 집안에서 쓰는 관


면류관(冕旒冠)

 

면관(冕冠)·평천관(平天冠)이라고도 한다. 면류관은 중국 고대 관모의 하나인 작변(爵弁)에서 발달된 것으로 후한(後漢) 때 완성되었다. 작변은 세포(細布)를 옻칠하여 머리를 넣는 각을 만들고 그 위에 평천판을 더한 형태이다.

여기에 유(旒)·광(纊)·진(瑱)·담(紞) 등의 수식을 더한 것이 면류관으로, 이것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기록은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 처음 보이고 있다. 1065년(문종 19)에 거란주(契丹主)가 왕과 세자에게 구류관(九旒冠)과 구장복(九章服)을 보내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403년(태종 3)에 명나라에서 왕의 면복을 가져온 이후 한말까지 착용하였다.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 서례(序例) 길례(吉禮) 제복도설(祭服圖說)에는 면류관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면판(冕版)의 너비는 8촌, 길이는 1척6촌으로 앞은 둥글고 뒤는 네모졌다. 겉은 검은색[玄色] 증(繒), 안은 붉은색[朱色] 증으로 쌌다. 관신(冠身)의 앞 높이는 8촌 5푼, 뒤 높이는 9촌 5푼으로 앞으로 숙여진 형태이며 금식(金飾)하였다.


면류(冕旒)는 9류로서 앞뒤 18류인데 유마다 주(朱)·백·창(蒼)·황·흑의 5채옥을 차례로 꿰었다. 면판의 옆에는 검은색 담이 있어 여기에 청옥으로 만든 청광충이(靑纊充耳)와 백옥의 진을 귀옆까지 늘어뜨렸다. 또 굉(紘 : 組纓)이 있어, 자조(紫組) 2줄을 관신의 양쪽 무(武)에 부착시켜 턱 밑에서 맺고는, 나머지를 늘어뜨렸다. 주조 1줄은 계(筓 : 금잠도) 왼쪽에 얽어매어 턱 밑을 돌려 오른쪽 위로 올려 계에 부착시키고 나머지를 늘어뜨렸다.”


또 세자의 8류관은, “9류면과 모든 양식이 같으나 면판의 너비는 8촌, 길이는 1척6촌이고, 관신의 앞 높이는 8촌 5푼, 뒤 높이는 9촌 5푼이다. 면류는 8류로 유마다 8옥이 있어 주·백·황의 3채옥을 차례로 꿰었다. 면판 양옆 검은색 담에는 다만 옥진을 늘어뜨려 충이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 면류관의 가장 큰 특징은 면판의 앞뒤에 늘어뜨린 유로, 그 숫자는 면복의 장문(章紋) 수와 같은데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천자는 백옥주(白玉珠) 12류, 황태자와 친왕은 청주(靑珠) 9류, 3공제후는 청옥주 7류, 경대부(卿大夫)는 흑옥주 5류, 3공 이하는 앞에만 유가 있었다.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면류관도 천자의 면류관인 12류면으로 바뀌었다.

≪대한예전 大韓禮典≫ 제복도설에서는 이것을 “면제는 원광(圓匡)의 오사모(烏紗帽)로 관 위에는 복판(覆版 : 평천판)이 있는데 길이는 2척 4촌, 너비는 2척 2촌이다. 겉은 검은색, 안은 붉은색으로, 앞은 둥글고 뒤는 네모지다. 앞뒤에는 황·적·청·백·흑·홍·녹의 7채옥주를 꿴 12류가 있다. 평천판과 관식을 고정시키는 옥형이 있고 옥잠도를 꽂는다. 옥주 2개를 연결한 청광충이를 늘어뜨리고 주영(朱纓 : 굉)으로 맺는다.”라고 설명하였다.


면류관의 앞에 늘어뜨린 유는 왕이 너무 눈이 밝음을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다. 좌우에 단 광과 진을 귀 옆까지 늘어뜨려 놓은 것은 귀가 너무 밝은 것과 외청(外聽)을 경계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안경집

안경을 넣어 보관하는 것으로 장신구의 역할도 한다. 주로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지승, 나무, 천 어피(魚皮), 대모(거북등껍질)등을 이용하여 만든다.



사냥꾼 도구



보부상

박다위 : 상인들이 짐짝을 어깨에 걸어 맬 때 사용하는 끈

박다위조이개 : 박다위를 팽팽하게 조이는 도구

보부상 임명장

보부상조직인 상무사에서 김경문을 장무원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

상평통보(寶)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편리한 거래를 위해 화폐 사용도 활발해졌다. 그래서 ‘상평통보’라는 동전이 만들어졌다. 상평통보는 인조 때 처음 만들어졌지만 잘 쓰이지 않아 없어졌다가, 숙종 때(1678년)부터 약 200년 동안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화폐 역사상 전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동전이다.


상평통보의 단위는 1문(푼)이라고 했는데, 10푼이 1전, 10전이 1냥, 10냥이 1관이었고, 관이 최고 단위였다. 조선 후기의 1냥은 약 2만 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동냥하는 사람들이 ‘한 푼 줍쇼.’라는 말을 하는데, 이때 한 푼은 조선의 화폐 단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약 200원 정도 되는 셈이다.

상평통보가 처음 나왔을 때, 백성들은 조그만 동전으로 쌀이나 옷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해 사용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세금이나 죄를 지은 사람들의 벌금을 상평통보로 받았다. 이런 노력과 더불어 상업이 발달하면서 18세기 후반부터는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돈인 상평통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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