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 이야기

운학리(雲鶴里)

浮石 2008. 5. 16. 07:50

 

 

 

 

 

운학리(雲鶴里)

일제때인 1914년 3월 지방 행정구역 개편때 오두치재 밑에 있는 끝 마을인 서운(瑞雲, 원래는 행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瑞院이라는 원집이 있었던 곳)과 어귀 마을인 학산(鶴山)에서 한자씩을 따서 '운학리'라 하였다.

운학리도 두산리와 같은 산촌마을로 오두치를 넘으면 횡성군 안흥면 다리골로 갈 수 있으며, 3개 행정리에 109가구 387명의 주민들이 하일, 덕은, 본전땅, 두무골, 고일, 서운 등의 촌락에서 주로 콩, 옥수수, 담배, 고추 농사를 짓고 있다.


하일(下日, 夏日)

운학리의 중심마을로 운학분교와 수주면 운학출장소가 있다. 여름철이면 철새인 왜가리와 두루미떼들이 많이 모여들어 이 마을에서 서식하였다. '일(日)'은 '곡(谷)', '실(谷)'과 마찬가지로 '동네'를 의미하는데 윗마을인 고일(高日) 아래에 있으므로 '하일(下日)'이라고 했는데, 下가 夏자로 변형되었다. '하일'은 '아랫마을'이라는 뜻이다.


학산(鶴山)

운학리 어귀인 하일에 있다. 섬안이강 상류로 논(沓)이 많은 지역으로 백로와 왜가리, 학(鶴)등이 있으므로 '학산'이라고 불렀다. 백로와 왜가리 등 철새들은 3월초에 이곳으로 날아와 초여름에 알을 까고 새끼를 키우며 살다가 10월 중순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대만,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방으로 날아간다. 2,3년 전만 해도 학산에는 왜가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농약피해로 인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곰산이골

서낭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구룡산(九龍山)줄기인 이 골짜기는 옛날에 곰이 많이 살았으므로 '곰살던골→곰산이골'이라 한다. 얼마 전만 해도 곰이 살던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곰'이란 '크다'는 뜻을 담고 있으므로 '큰산골'을 의미한다.


넘은 구렁이

운학출장소를 지나 두산리의 두릉이나 강림면 월현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길이 험하고 구불구불하여 멀리서 보면 마치 구렁이가 산을 넘어가는 형상이므로 '넘은 구렁이'라 한다. 지금은 열 서너 가구가 살고 있다.


덕은(德隱)

하일(夏日) 북쪽으로 절골의 긴 골짜기를 지나서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운학리 사람들은 덕은과 노루목재를 넘고 월현리(月峴里)를 지나 횡성의 강림장(講林場)을 보러 다녔으며, 한 때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 마을은 김덕은(金德隱)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개척했으므로 '덕은'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노루목재

덕은에서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의 골미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 고개는 굽이가 심하지 않고 노루의 목처럼 길고 비스듬하게 늘어진 고개이므로 '느린목→느르목→노루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무골(斗務谷)

운학분교 동쪽으로 소재를 넘으면 엄둔의 피두리로 갈 수 있다.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힌 '둠뫼' 즉, 두메산골에 있는 골짜기의 언덕인 '둠'이 음차되어 '두무골'이 되었다. 두무골은 두무실, 도마실, 도마치와 뜻을 같이한다.


피막골

두무골과 소재 사이에 있는 구룡산 줄기로 큰 피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피나무 껍질을 벗겨서 밧줄을 만드는 재피작업을 위해 움막을 치고 살았으므로 '피막골→피박골'이라고 한다.


용각산(龍角山)

고일과 엄둔 사이에 있는 산으로 거칠치재가 있다. 예전에 가뭄이 들 때는 닭을 잡아서 그 피를 용각산에 뿌리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꼭 비가 내리는 영험함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산의 형세가 용의 뿌리처럼 뾰족뾰족하게 생겼으므로 '용각산'이라고 불렀다.


베틀바우굴

운학리의 마암동에 있는 동굴이다. 옛날 여인네들이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하여 이곳 동굴에다 명주, 무명, 삼베 등 피륙을 짜는 베틀을 설치했으므로 '베틀바위굴'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하는데, 2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굴이다. 일설에는 예전에 탐관오리들이 베나 모시를 빼앗아 갔으므로 이곳에 숨어서 베를 짰다고 한다.


물구비

고일(古日)과 운일분교(雲日分校)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오두치(烏頭峙)와 기해목에서 시작되는 계곡 물이 이곳에 와서는 심한 굽이를 이루면서 꺾어져 흐르는 지형이므로 '물구비'라 부르게 되었다.


가래나무골

서운(瑞雲)마을의 서쪽 맞은편에 있는 여러 갈래의 계곡 중에 첫 번째 골짜기로 한방의 약재로 쓰이는 가래나무(楸木)가 많으므로 '가래나무골'이라고 부른다.


손이골(손우골)

서운(瑞雲)과 고일(古日)의 지명에서 한자씩을 따서 만든 운일분교(雲日分校)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호랑이 사냥을 위해 손우를 설치했던 곳이므로 '손우골'이라고 한다.

수주면 운학리는 깊은 산간지역으로 옛날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마을에서 가축이나 사람들을 물어갔다. 사람들은 호환을 예방하기 위하여 산맥이를 하거나, 산초나무 연기를 호랑이가 맡으면 죽는다고 믿었으므로 날이 어두워지면 마당 가운데 산초나무를 태우면서 호랑이의 침범을 막았다. 그 외에도 깊은 산 속의 화전촌(火田村)에서는 밧줄로 엮은 호망(虎網)을 치거나, 두꺼운 통나무로 빗장을 만들어 문을 보호하거나, 참나무를 엮어서 발을 만든 다음 문 앞에다 참나무 장작발을 설치하여 호환(虎患)을 막기도 하였다.

옛날 화승총이 귀하던 시절에는 쇠 이빨을 한 '덫(쬐기)'을 길목에 설치하고 그 위에 나뭇잎을 뿌려서 호랑이를 잡는 방법과 갓처럼 생긴 손우칼을 다래나 칡넝쿨 같은 곳에 틀어서 매어 놓았다가 호랑이가 튕김줄을 건드리면 굵은 통나무가 호랑이를 내리치는 '갈리',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어서 45도 경사로 세운 후, 그 밑에는 버팀목과 무거운 돌을 눌러놓은 채 고깃덩어리를 미끼로 매어 놓으면, 호랑이가 그 먹이를 먹으려다가 버팀목을 건드리면 틀이 내려앉아 호랑이를 압사시키는 '벼락틀', 그리고 길목에다 깊은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는 뾰족하게 깎은 나무를 박아 놓고 그 위에는 잡목이나 깊은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는 뾰족하게 깎은 나무를 박아 놓고 그 위에는 잡목이나 풀, 흙을 덮어놓는 '함정(허방다리, 화질구뎅이)'등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냥을 하였다.


서운(瑞雲)

운학리(雲鶴里)의 끝마을로 옛날 행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집인 '서원(瑞院)'이 있었다. 원지명은 '서원'이었으나 후에 '서운(瑞雲)'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운학은 교통의 오지로 예전부터 생활권은 횡성군 안흥이었으므로 오두치 재를 넘나드는 행인들이 많았고 이 마을에 원집이 있었던 것이다. 원터는 서운의 주막거리 맞은편의 사양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행인이나 장사꾼들이 넘어 다니던 오두치재에는 그들이 여행의 안녕을 기원하던 서낭당과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지금도 당목인 자작나무가 남아 있다고 한다. 서운은 화전정리를 하던 70년대 초에는 80여 가구가 골짜기마다 살았으나 지금은 19가구에 노인들만이 살고 있다.


앞물안골

서운의 노랑골 밑에 있다. 삿갓봉과 기해목에서 흐르는 냇물 맞은편에 있으므로 '앞 물안골'이라 하고 맞은편인 서운 뒤에는 뒷 물안골이 있다. 옛날 앞 물안골에 살던 김선달의 어머니가 밤중에 마실을 다녀오다가 큰 호랑이에게 물려 갔는데, 결국은 앞물안골 뒷산에 있는 범굴에서 호식(虎食)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김선달은 청년이 된 후 그 호랑이를 죽여 어머니의 원수를 갚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쐐기골

뒷물안골 위쪽에 있다. 서운동의 북서쪽 골짜기로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다 가랑잎이나 흙으로 살짝 덮어놓는 사냥기구인 '쬐기(덫)'를 설치했던 곳이므로 '쬐기골→쐐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제시대때 공출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숨어서 쐐기로 목화솜을 타사 '쐐기골'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큰골(大谷)

서운에서 손이골을 지나 횡성군(橫城郡) 안흥면(安興面) 상안리(上安里)의 마림골로 가는 큰 골짜기이다. 기해목을 지나면 횡성군과의 경계가 되는데 골이 깊고 또한 크므로 '큰골' 또는 '대골'이라 하였다. 이 골짜기는 좌우로 노랑골, 옻밭골, 옥바우골 등의 많은 골짜기가 있다.


옷밭골(漆田谷)

노랑골을 지나 옥바우골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옷나무가 많은 곳이므로 '옷밭골'이라 한다. 그 입구에는 소쿠리처럼 생긴 '소쿠리탕'이라는 푸른 소가 있어서 여름 철에는 피서객이 많이 찾고 있으며 인가는 없다.


벼락바위골

서운동에서 큰골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그 막바지인 안세월이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계해년 기력때 이 계곡에 있는 큰 바위가 벼락을 맞았으므로 그때부터 '벼락바위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계해목이

서운동 북서쪽에 있다. 횡성군(橫城郡) 안흥면(安興面) 상안리(上安里)의 마림골과 경계이다. 넓고 평평한 계곡 골짜기로 예전에는 이곳에서도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1932년 계해년(癸亥年)에 있었던 장마와 산사태로 그 넓은 밭들이 모두 재작밭(자갈밭)으로 변하여 경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계해년부터 발이 묵었으므로 '계해목이→기해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수십년 묵은 낙엽송이 묵정밭에 가득하다.


오두재(烏頭峙)

소운 북쪽에 있는 고개로 횡성군(橫城郡) 안흥과 경계가 된다. 서운에서 오두재골을 지나면 안흥의 다리골로 가는 옛 길이 있었다. 고개가 높아서 '가막재'라고 했으나, 경음화현상으로 '까마귀재(烏頭峙)'로 그 뜻이 완전히 변했으며, 잿말랑에는 돌무더기와 서낭당이 있었다. 오두치 밑에 있는 골짜기를 '오두재골'이라고 하는데, 1991년도에 오두치 밑으로 도로가 개통되어 많은 차량들이 안흥의 배나무거리로 넘어 다닌다.


광대소골(廣大沼谷)

큰골 북서쪽으로 오두재골 맞은편에 있다. 예전에는 대여섯 가구의 화전민(火田民)이 살던 곳으로 들녘에는 넓은 밭들이 많았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마을 안쪽 깊숙한 계곡에 넓고 큰 소(沼)가 있으므로 '광대소골(廣大沼谷)'이라고 불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광대속골'로 와전되었다.


도마목이(도매골)

광대속골 맞은편으로 뒤에는 해발 1,029.8m의 높은 삿갓봉이 솟아있어 그 줄기가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다. 도마목이는 두뫼산골 마을인 '두뫼'가 '둠뫼→두무→도마'로 변하면서 '도마목이'로 표기되었다. 1970년도까지 서너가구가 살았으나, 화전정리로 마을은 없어지고 지금은 그때 심은 낙엽송이 묵밭에 가득히 자라고 있다. '도마'는 두뫼산골의 원형인 '둠'을 뜻하고 '목이'는 '위치, 장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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