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오미재고개

浮石 2008. 5. 25. 04:07

 

 

 

현리전투는 1951.5.17~25일사이에 현리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당시 국군 3군단(3사단, 9사단)은 이 지역에대한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고 오마치(현 오미재고개)고개가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의 전투지경선상였습니다.

3군단장 유재흥소장은 이미 1950년 10월경 청천강에서 2군단장으로서 중공군의 포위공격으로 전멸당한 경험이 있어서 군단 유일의 전후방 종심도로인 인제-오마치고개-아홉살이 고개-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확보하기위해서는 오마치고개에대한 방어가 결정적임을 알고 미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에게 협조를 부탁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몬드소장은 유재흥소장의 협조요청을 묵살하고 오마치고개는 미 10군단 지역으로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중공군소속의 1개대대(이 부분은 현재도 논란거리인데 중공군 수색대대병력인지 중공군에 배속된 북괴군 특수전부대인지, 북괴군 수색대 병력인지 논란이 많습니다.병력규모도 중대인지 대대급인지 증강된 중대급인지 이부분도 확실치 않지만 대체로 1개대대규모의 중공군 수색대대로 보는경향이 있습니다.)가 화천을 거쳐 우회침투해서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유일한 후방통로를 상실한 3군단은 간신히 소총정도 휴대하거나 소총도 포기하고 민간복장으로 갈아입고 군단장을 비롯해 군단직할 포병대, 3,9사단은 무계획적인 철수를 하다가 이 대대병력의 기습을 받고 군단이 괴멸당합니다.

3사단은 40%, 9사단은 30%병력만 간신히 철수에 성공했고 군단의 야포들과 중화기들은 그대로 적에게 노획되었죠.

몇일후 군단병력은 60~70% 수준까지 낙오자들의 복귀로 채워지지만 당시 전투에서 수많은 희생자들과 국군포로들이 발생했습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전장에 노출되어 있다가 수일후 국군의 반격작전으로 인근지역이 회복되면서   전장정리가 시작되고 국군은 현지 방태산일대와 대암산 일대에 가매장하거나 화장해 처리했고 전후 대부분은 발굴한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방태산이나 대암산 그리고 험준한 인근지역 산속 1~2미터 지하엔 당시의 유해들중 일부가 묻혀있을거라고 추정됩니다.

워낙 지형이 험준하고 인제지역에 마을들이 복구되면서 시신의 썩는 냄새때문에 대부분은 처리된걸로 알고있는데 어느정도 가매장된 후 전우들의 기억이 흐릿해지면서 버려진 국군/적군 시신들은 일부지만 있을것입니다.

이 지역 전투는 수없이 많은 증언자들의 증언과 당시 마을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전쟁사가 발간되고 뒷처리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버려진 시신들이 많지는 않을거고, 현재 마을주민중 70대정도면 당시 기억이 남아있을겁니다.

시신의 썩는냄새는 상당히 고약해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을걸요.

그리고 방태산이나 대암산 부근은 군관련시설도 많이 들어섰고 마을주민들의 밭도있고 개간도 있었으므로  버려진 시신들은 거의 없을거라고 보입니다.

최근엔 내린천때문에 관광자원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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