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느티마을

浮石 2008. 7. 9. 16:24

 동대재에서 내려다 본 영춘 느티마을 전경

 

곡계굴이 있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단양에서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더 들어가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다. 곡계굴은 마을 가운데 난 도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야산 아래 위치해 있다. ‘곡계굴 이곳에서부터 150미터’란 표석을 확인하고 논길을 따라가다보니 길이 뚝 끊겼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잡풀들로 길이 덮여 있었다. 잡풀을 헤치고 10여 미터를 들어가니 수 십개의 만장 깃발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만장에 새긴 글귀를 눈에 넣으며 눈길을 옮기니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곡계굴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는 자물쇠가 달린 철문이 설치돼 있어 평소 출입을 통제함을 알 수 있었다. 입구 위로는 ‘곡계굴 희생자 제57주기 합동위령제. 2008. 1. 19. 11시, 곡계굴유족대책위원회’라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굴 주변의 수 십개의 만장은 합동위령제 때 세워진 것이었다.

민간인 피란처에 미군 폭격
곡계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51년 1.4후퇴를 전후로 영춘은 인민군과 연합군이 일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던 지역이었다. 그 와중에 영춘면의 주택은 대부분 불에 타고 피란민들도 큰 화를 당했다. “마을에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피란을 나갔지. 그런데 못 나가게 된 거라. 결국 갈 곳은 없고 안전한 곳을 찾다보니 곡계굴로 들어간거지. 굴에서 10여 일을 생활을 했어요. 우리 표현으로는 아군이지 미군을 아군이라고 하잖아요. 미군 비행기가 2∼3일을 정찰을 하더라구. 그러다가 (1951년 1월) 21일 오전 10시 반인가 정찰기 한 대가 곡계굴 주변을 낮게 정찰하더니, 바로 쌕쌕이 4대가 날아와서 굴 입구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해댔어.” 당시 굴안에서 피란생활을 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엄한원 옹의 말이다. 그는 “미군이 네이팜탄을 투하한 것 같아. 네이팜탄 가스가 굴 안으로 들어와서 당시 굴 안에 있던 300여 명의 대부분이 질식사했어. 나는 폭격 시작되고 10분 만에 안에서 질식사하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겠다고 뛰어나갔는데 운 좋게 살아났지”라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함 옹은 당시 일가족 7명과 함께 굴 속에서 피란중이었는데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를 제외하곤 모두 굴 안에서 죽었다. 그의 가족들 중 살아남은 이는 외지로 피란나갔던 형과 그, 둘 뿐이다.

“그 때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면사무소에서 인부 다섯명을 샀다. 굴에서 썩어있는 무연고 시체를 수습해 인근 산에다 대강 묻는 일을 그들이 했다. 하도 시체가 많아서 다섯명이서 근 한 달간 그 일을 했다.”
당시 면사무소에서 일을 했고 이후 면장까지 지낸 조태훈 씨(76)의 말이다.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도 그 굴에서 죽었다.
김옥이 씨(74)는 당시 굴에는 없었지만 미군기의 폭격장면을 거리를 두고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 애아버지 조일원 씨(83)도 거기에 들어가 있어서 내가 기억이 잘 나는데··· 폭격 있기 하루 전에 피란민들이 굴에서 나오는데 한 3,4백 명은 족히 됐다. 그 굴속에 20여 일을 갇혀 있었는데 폭격이 뜸하니까 이젠 나가자 해서 각자 자기 동네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서 다시 모두들 그 굴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미군 정찰기가 와서 정찰을 하고 가더니 30분쯤 있으니까 또 다른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해댔다. 나는 그 때 밭을 메고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다 지켜봤다.”
-99년 11월호 『말』, ‘제2의 노근리- 충북 영춘 곡계굴의 4백 원혼’ 기사 중 인용-


엄 옹은 이날 오전 10시반 시작된 폭격이 오후 3, 4시까지 계속됐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미군은 왜 민간인들이 피란해 있는 곳에 폭격을 했을까? 굴속에 피란해 있는 주민들을 인민군으로 오해한 것 같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엄 옹은 “마을에 있던 인민군들은 폭격이 있기 하루 이틀 전에 다 후퇴해 갔다”라고 말했다.

가슴에 한 말도 못하고
수십년 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유족들의 가슴에 한으로만 남아있던 곡계굴 사건은 단양군이 발행한 허술한 단양군지와 이를 바로잡으려는 향토사학자 우계홍 씨(1999년 사망)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990년 12월 15일자로 발행된 단양군지 187쪽엔 단양의 해방이후사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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