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 이야기

흥월리

浮石 2008. 8. 22. 11:38

 

 

큰팔계에서 흥월리 달이말로 넘어가는 더울고개 정상 산등성이가 높고 경사가 심하여 한겨울에도 이 고개를 넘자면 온 몸에서 땀이 흐르는데 고개 정상에 큰 소나무가 있어 사람들이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고 갔으므로 '더울고개'라고 하였다.

정양리 잠수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흥월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많이 이용하였다.

 

장승개 - 네 번째 마을 이며 장선 또는 장서이 (흥월리 특유의 방언)라고도 부른다.

아랫말 남쪽으로 홍교, 조전리를 거쳐 충북 영춘, 단양으로 가는 옛길이었다.

옛날 이곳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긴 장승이 있었으므로 '장승개(장선이)'라 하였다.

장승은 우리 조상들이 커다란 나무를 숭배했던 원시신앙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을 어귀에 무서운 형상을 하고 서 있는 것은 동네의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서이다.

그 외에도 옛날 여인네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을 점지해 달라거나, 길 떠난 남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신앙이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길가는 나그네들이 괴나리봇짐을 풀어놓고 쉬어가는 휴식처와 이정표 역할도 하였다.

 

 

 

 

강 영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리()이다.태화산 끝자락에 위치한 산간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반달모양이므로 월곡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으며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가있었으므로 '흥교'라 하였다. 이 두 마을을 합하여 흥월이라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점골, 납산골, 달골, 안달골, 다릿골, 뒷골, 흥교 등이 있다.

 

 

마선굴(馬仙窟)
옛날에 신선이 말을 타고 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마선굴'이라 한다. 석회암동굴로 석순과 종류석이 있으며 여름 한철 피서지로 이용되고 있다.


큰골(大谷)

흥월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약물골을 통하여 태화산(太華山)으로 갈 수 있는데 길옆에서 솟아나는 굴물은 차고 깨끗하여 옛날에는 나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 왔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물을 이용하여 송어 부화를 하고 있고 흥월리 간이상수도의 수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삿갓봉

큰골과 장승개 사이로 그 남쪽에 있다. 산봉우리가 삿갓 모양이므로 '삿갓봉'이라 한다.


장승개(장선이)

아랫말 남쪽으로 홍교, 조전리를 거쳐 충북 영춘, 단양으로 가는 옛길이었다. 옛날 이곳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긴 장승이 있었으므로 '장승개(장선이)'라 하였다.

장승은 우리 조상들이 커다란 나무를 숭배했던 원시신앙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을 어귀에 무서운 형상을 하고 서 있는 것은 동네의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서이다. 그 외에도 옛날 여인네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을 점지해 달라거나, 길 떠난 남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신앙이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길가는 나그네들이 괴나리봇짐을 풀어놓고 쉬어가는 휴식처와이정표 역할도 하였다.


점골(店谷)

뒷뒤실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히고 오목하게 생긴 지형으로 옛날에 야장(冶匠)이들이 풀무를 설치하여 칼, 호미, 농기구 등을 벼름질하던 점터가 있었으므로 '점골'이라 한다.


납산골

치용골의 남동쪽에 있다. 좁은 골짜기로 한참 들어가면 일제 때 납(아연)을 캐내던 아연광이 있었으므로 이곳을 '납산골'이라 한다.


달골(月谷)

장승개 동남쪽에 있다. 순수한 토박이 땅이름인 '당리골→달골'의 '달'은 '산'을 일컫는 옛말로서 '달골'은 '산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또는 마을의 지형이 반달모양이므로 월곡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는 '달'이 '월(月)'로 된 것에 불과하다. 이 곳에는 큰 연자맷간이 있었는데 지금도 달골 신씨네 집 앞에는 연자방아가 있다.


안달골

달고 안쪽에 있으므로 '안달골'이라 한다. 안달골에서 남면 조전리 심상골로 넘어가는 고개에 소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를 '소바우재'라 한다.


용바우소(龍岩沼)

물방아골 뒤쪽으로 맑은 냇물이 흐르고 용머리처럼 생긴 큰 바위 밑에 깊은 소(沼)가 있어서 '용바우소'라고 한다. 가뭄이 들 때 이곳에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다고 전해진다.


달이마을(月休里), 다릿말

흥월리의 중심 마을로 흥월초등학교가 있다. '달'은 '산' 또는 '들'이라는 우리의 순수한 말인데 달이 연철현상에 의해서 '다라→다리'로 변했다.

'달(산)'이 한자식 표기법인 '월(月)'로 잘못 의역되어 '산골마을'이라는 뜻의 '달(山)+이(의)+마을'이 '다릿말, 달지말(月休里)'로 변했으며, 이 마을 뒤에 있는 '달골'도 '산골짜기'라는 우리 고유의 땅 이름이다. 그러나 한자 생활권의 영향을 받아 '다릿말'을 '월휴리(月休里)'로 표기하여 달(月)과 연관시키거나 옛날 이 마을에 큰 다리가 있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영월 신(辛)씨로 평창군 봉평면 원길리에서 출생한 조선 순조임금때 대학자인 신범(辛汎)은 영월을 찾아온 「월행(越行)」이라는 기행문에서 종친(宗親)마을인 월휴리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읊었다.

월휴촌(月休村)

  금강수는 양이요 태화산은 음인데

  월휴촌은 옛부터 수려하고 깊구나

  어느때 어느 할아버지가 이곳에 자리잡았는지

  우리 신씨들이 오늘까지도 잘 살고 있다네


잣나무배기

윗마을에서 큰팔계로 넘어가는 더울고개 밑에 있다. 예전부터 언덕배기에 커다란 잣나무가 많았으므로 '잣나무배기'라 했으며 지금도 큰 잣나무 몇 그루가 남아있다. '배기'는 '박다'의 명사형으로 '박+이'란 뜻으로 잣나무가 많이 박혀있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뒷골

다릿말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골'이라고 하며 그 서북쪽에는 넓은 농토가 있으므로 그곳을 '뒷들'이라고 불렀다.


자작이재(묏동골)

윗말에서 뒷골을 지나 자작이재를 넘으면 T.V무선 안테나가 있는 남면 광천리 매화동(묏동골)으로 간다. 이 고개에는 자작나무가 많으므로 '자작이재'라 한다.


흥교(興敎)

달골에서 휜깃재(홍교재)를 넘어 흥교분교가 있는 동네로, 학교터에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興敎寺)'가 있었으므로 '흥교'라 하였다.

이곳은 남면 조전리, 충북 하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웃인 장승백이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에는 교통의 중심지로 한 때는 50여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너덧 가구가 살고 있다.

『태화산(太華山) 서쪽인 소백산으로 고려 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興敎寺)가 있었고 이 절에는 고려 인종(仁宗)의 아들인 충희(?曦)대사의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이며 우사간이었던 최선(崔詵)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비문을 썼다. 글씨는 벗겨져서 한 자도 알 수 없으나 승통을 지낸 충희의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흥교에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흥교사는 아홉 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었고 공양미를 씻을 때는 뿌연 쌀뜨물이 영춘의 군관 모랭이까지 흘러갈 정도로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들의 부패가 심해져, 돈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러오면 돈과 물건을 빼앗은 뒤 마을 뒤에 있는 사굿구덩이에 처박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곳 흥교사는 빈대가 많이꼬여서 결국은 절에다가 불을 질렀는데 절집이 보름간을 탔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며 얼마전 객토를 위해 땅을 팔 때 절터에 타다 남은 기둥과 숯이 나왔었다.

그 절터인 흥교분교 운동장에서 1984년 높이가 6.5cm, 둘레가 2.5cm인 석가여래입상이 발굴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흥교사의 규모가 크고 화려했음을 알 수 잇는 것은 이곳 절터에서 영월 지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개와(蓋瓦)가 발견되었는데,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와 귀면와(鬼面瓦), 그리고 용 두 마리가 좌우에 서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구슬띠무늬(蓮侏文)가 그려진 암막새(암키와 끝에 드림새를 붙이는 개와)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부도나 고려 청자 파편, 석탑조각들이 그 흔적을 남긴 채 널려있다.

영월의 흥교사(興敎寺)를 신라 때는 세달사(世達寺)라 했는데, 후고구려를 세운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弓裔)가 이곳에서 중이 되었다고 「삼국사기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弓裔 便去世達寺 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自號善宗, 궁예는 세달사로 갔으니, 지금의 흥교사가 있는 곳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되어 스스로 이름을 선종이라 하였다.』

또한 흥교사가 세달사임을 밝혀주는 내용이 삼국유사 卷三에 있다. 『昔新羅爲京帥時 有世達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奈 李郡 按地理志 溟州無奈李郡唯有柰城郡 本奈生郡 今寧越,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지금의 흥교사)의 莊舍(농장)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지리에 의하면 명주에 내리군은 없고 다만 내성군이 있었는데 본래는 내성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

그후, 궁예는 환속하여 892년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를 중심으로 진(陳)을 치고 내성(奈城, 영월), 주천(酒泉), 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진부)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주천에 있는 법흥산성, 도원산성 그리고 북면의 공기산성이 그 당시에 쌓았던 성(城)으로 추정된다.


미륵불상께

흥월리 물방아골에서 흥교로 가는 옛길 산마루로 흥교사가 뒤에 있다. 화강암으로 된 미륵불이 서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파손되어 숲 속에 방치되어 있다.

그 앞에는 흥교사의 정원이었던 연못터가 있는데 지금도 산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미륵불상께 뒤에는 파주막 터가 있고 그 남동쪽에는 스님들을 화장했던 '화장터골'이라는 곳이 있고 딱따구리가 서식하고 있다.

 

'寧越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천면-서면 신천리간  (0) 2008.10.05
미사리(未死里)계곡  (0) 2008.08.24
가재골 폭포  (0) 2008.08.21
가재골  (0) 2008.07.10
각동의 맞밭나루  (0) 2008.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