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 이야기

영월 창절서원

浮石 2009. 5. 7. 09:38

 

 배견루

 윤사국이 쓴 ‘창절서원(彰節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西齋 (서재)

 東齋(동재)

彰節祠 (창절사)

동무

서무 

 창절서원은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1685년(숙종 11) 창건 당시에는 강원감사 홍만종과 군수 조이한에 의해 육신사(六臣祠)로 시작되었는데, 1705년(숙종31) 육신사를 장릉 밖으로 이건하면서 창절사(彰節祠)로 개칭하였으며, 1788년(영조 12)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91년(정조 15)에는 김시습과 남효원을, 1828년(순조 28)에 박심문을, 1833년(순조 33)에 엄흥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창절서원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인 박팽년(朴彭年;1417∼1456)·성삼문(成三問;1418∼1456)·이개(李愷;1417∼1456)·유성원(柳誠源;?∼1456)·
하위지(河緯地;1387∼1456)·유응부(兪應孚?∼1456)와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서원의 명칭인 창절(彰節)은 불의에 항거하고 대의에 따라 비장하게 최후를 마친 충신의 절개를 길이 표창한다는 의미이다.

1685년(숙종 11) 창건 당시에는 강원감사 홍만종과 군수 조이한에 의해 육신사(六臣祠)로 시작되었는데, 1705년(숙종31) 육신사를
장릉 밖으로 이건하면서 창절사(彰節祠)로 개칭하였으며, 1788년(영조 12)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91년(정조 15)에는 김시습과 남효원을, 1828년(순조 28)에 박심문을, 1833년(순조 33)에 엄흥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창절사(彰節祠)·동무·서무·육신사(六臣祠)·강당·동재·서재·배견루(拜鵑樓) 등이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 공간인 강당이 전면에 있고 제사 공간인 사우(祠宇)가 후면에 있는 전학후묘의 구조로 되어 있다. 문루인 배견루는 정면 3칸·측면 2칸으로 된 상하 2층의 건물로서 창절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1층은 전면 3칸에 출입문을 설치하였고,2층은 누각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배견루를 들어서면 강당에 해당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있는데, 건물 정면에 윤사국이 쓴 ‘창절서원(彰節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의 좌우에는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의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서원에서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서재는 한말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육신사는 강학 공간인 강당을 지나
사우인 창절사로 들어가는 문이며, 창절사는 정면 5칸·측면 2칸의 부연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절사의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지금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