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소쇄원(瀟灑園)

浮石 2011. 11. 1. 00:00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소쇄원 입구

소쇄원은 조선중기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조성한 대표적인 민간 별서정원이다.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고 사사(賜死)되자 세속의 뜻을 버리고 고향인 창암촌에 소쇄원을 조성하였다..

오곡문(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오곡문 아래로 흐르는 계곡수인데 요즘은 가뭄 탓에 거의 말라있다.

소쇄처사양공지려(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제월당(霽月堂)

제월당 현판도 우암 송시열이 썻다고 한다..

 

제월당(霽月堂)

제월당(霽月堂)

제월당(霽月堂)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 같은 집. 
이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1045~1105)이 성리학자 주돈이(1017~1073)의 인품 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 해가 뜨면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胸懷灑落 如光風霽月)고 말 한데서 따 온 이름이다. 

제월당은 두 칸의 마루와 한 칸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주인이 거처하며 독서하던 곳이었다. 나는 마루에 올라 제월당 현판을 보고서 먼저 방안으로 들어간다. 방 내부에는 벽에 글씨가 여러 폭 붙어 있고 소치 허련의 난초 그림도 있으며, 천장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있다. 
  

제월당과 광풍각을 연결하는 문

광풍각(光風閣)

광풍각은 방문객들에게 방을 내어주는 사랑채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계류 사이의 험준한 공간에 석축을 쌓고 땅을 다져서 만든 이곳은 습한 기운이 감도는 곳인데 건축물은 소쇄원내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있다한다. 소쇄옹은 자연에 묻혀 살았지만 가끔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나 보다. 그런 인사들이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석천 임억령, 고봉 기대승등이었고,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등도 자주 소쇄원을 들렀다 한다.

 

광풍각(光風閣)

광풍각(光風閣)

광풍각(光風閣)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쓰인 광풍각은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이라 한다..

 

대봉대(待鳳臺)

 

대봉대(待鳳臺)는 ‘기다리는 손님을 주인이 봉황처럼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의 정자 이름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대’라는 뜻도 된다. 봉황은 나라가 태평한 세월에만 나타나는 상상속의 새이며 성군의 의미도 있다. 임금다운 임금, 덕치를 하는 성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

 

1985년에야 복원된 이 초정은 소쇄원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시가 바로 면앙정 송순(1493-1582)의 시이다. 양산보와 이종 간(송순의 고모가 양산보의 어머니임)인 면앙정 송순이 1534년에 지은 ‘외제 양언진 소쇄정 4수 가정 갑오’시에는 초정 이야기가 나온다.   

작은 집 小閣 영롱하게 지어져 있어
앉아보니 숨어살 마음이 생긴다.
연못의 물고기는 대나무 그늘에서 노닐고
오동나무 밑으로는 폭포가 쏟아지네.
사랑스런 돌길을 바삐 돌아 걸으며
가련한 매화 보고 나도 몰래 한숨 지어
숨어 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날지 않는 새집을 들여다보네.  

  작은 집, 연못, 대나무 그늘, 오동나무 아래 폭포, 매화꽃 등등 소쇄원의 정경이 자세히 적혀있다. ‘숨어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날지 않는 새집을 들여다보네.’ 란 마지막 구절은 자연에 묻혀 사는 소쇄옹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김안로의 전횡으로 1533년부터 창평에 낙향하여 살고 있는 송순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위교(危橋)

위교(危橋)

혼자서만 건널 수 있는 다리 위교(危橋: 위태로운 다리)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게액되어 있으며, 1755년(영조 31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 담양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송강문학기행 :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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