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선운사

浮石 2011. 11. 10. 00:00

 

선운사 극락교와 천왕문

천왕문(天王門)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2층 누각 건물인데, 아래층에는 4천왕상이 있으며, 위층에는 종과 법고가 있다.

 

 

 

 

 

대웅보전과 만세루

만세루(萬歲樓)

대웅보전 앞에 있는 만세루(萬歲樓)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나 아직도 700년이나 된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다.
건물의 기단은 석조로 세웠으며, 대들보와 기둥은 원목을 가공하지 않고 나무 형태를 유지하여 건축에 사용함으로써 자연적인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건물 내부에는 각종 사적기(事蹟記)와 현판이 16개나 걸려 있다.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53호이다.

 

만세루(萬歲樓)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중앙칸(御間)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간(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하였다. 중앙 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만세루(萬歲樓) 뒤쪽

만세루(萬歲樓) 천정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290호)

 

선운사 대웅보전 (보물 제290호)

6층석탑 (유형 문화재 제29호)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방형의 축대 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그 위에 다시 방형의 중석(中石)을 세우고 중석의 네 귀는 우주(隅柱)로 조각하였다. 갑석(甲石)은 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면은 수평으로 다듬고 중앙에는 1단의 받침을 새겼으며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룬 채 중앙에 1단의 옥신(屋身) 괴임이 있다. 각 층의 옥신은 하나의 돌로 만들고 네 귀마다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추녀는 수평을 유지한 채 하늘을 향해 약간 반전되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옥신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옥개석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체감률이 심한 편이며, 3층 이상부터는 동일한 체감률로 이루어져 있다. 6층의 옥개석 위에 노반이 있고 노반 위에 복발(覆鉢)이 남아 있으며, 그 위에 팔각의 귀꽃으로 각출된 보개(寶蓋)를 얹어 놓았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 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하였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영산전(靈山殿)은 대웅보전의 서쪽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조성된 영산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1471년 처음 조성될 때는 2층 전각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1614년에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고 1821년과 1839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장육전이라 이름은 내부에 봉안된 불상이 1장 6척이나 되는 큰 불상이었기 때문이며, 거대한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서 2층의 누각 건물로 조성했던 것이다.

 

 

대웅보전 서편의 영산전에 봉안된 목조삼존상으로서, 석가모니불 좌상을 주존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입상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3m, 협시보살의 높이는 2.4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주존은 16각의 난간을 두른 목각연화대좌(木刻蓮花臺座)에 모셔져 있다.
가운데 석가여래좌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육계는 없으며, 얼굴은 방형(方形)에 가깝다. 목부문 아래에 삼도(三道)가 좁게 표현되어 있고, 통견납의(通肩衲衣)의 간략한 의습에 가슴 밑 군의상단(裙衣上端)이 직선적이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손 등을 위로 하여 중지(中指)를 무릎에 접하고 있고, 왼손은 손 등을 밑으로 하여 제2지(第二指)와 무지(拇指)를 맞대고 있다.
양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寶冠)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 삼존상은 목조불로서는 희귀한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신각(山神閣) : 영산전 뒤쪽, 팔상전(八相殿) 옆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1614년에 조성된 이후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다.
산신각은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전해 오던 토착 신앙이 불교가 도입되면서 서로 융합되어 새롭게 산신 신앙으로 등장한 것으로 우리 나라에만 나타나는 신앙 형태이다.

 

명부전(冥府殿)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초익공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연봉이 달린 쇠서나 봉황두 형태의 초각 등에서 조선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나타난다. 전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 하단에 판장문 형태로 마감하였다.

 

선운사 범종각과 감나무

선운사 범종각과 감나무

선운사 범종각과 감나무

선운사 동백나무 숲

 

선운사 동백나무 숲 

 

 이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무의 평균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로서, 절 뒷쪽 비스듬한 산 아래에 30m 넓이의 가느다란 띠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ㆍ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ㆍ추백(秋栢)ㆍ동백(冬栢)으로 부른다. 이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 문화적 가치와 동백나무숲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선운사 감나무

선운사 감나무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운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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