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돈사지는 말끔하게 정돈한 폐사지다. 여행자들이 그리는 모습에 가깝다. 폐사지가 첫 방문인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거돈사는 신라말 안락사로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도헌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으나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된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중심인물인 원공국사(圓空國師, 930~1018)는 속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법호가 지종(智宗)인 그는 여덟살 나이에 개경 사나사(邪那寺)에서 출가 광화사의 경천화상으로부터 공부를 했고 17세에 송악산 영통사에서 주족계를 받았다. 955년 중국 오월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의 법맥을 전수받았다. 그 후 중국 천태종 근본도량인 천태산 국청사에서‘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우고 천태종지를 가르치는 교수사가 되어 970년 고려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정치를 표방하던 광종의 비호를 받으며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고 그의 급진적 개혁정치가 중도에 그치면서 법안종 세력도 급속도로 위축되고 원공국사도 89세인 1018년 병든 몸을 이끌고 거돈사에 이르러 임종을 맞았다. 입멸 후 현종으로부터 국사 원공으로 추증된 그는 탑비와 함께 비의 서쪽 기슭에 부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지금 거돈사 터에는 현종16년(1025) 조성된 부도비(보물제78호)만 남아 있고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은 짝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和田)가 서울의 자기 집으로 옮겨간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절터 아래 옛 정산분교 자리에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당간지주를 보면 이 절의 규모가 짐작된다.
이 절터는 현재 남아 있는 3층석탑(보물 제759호)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사가 좀 센 까닭에 석축을 높이 쌓아 조성한 평지에 중문지를 만들고 이러 일탑 일금당식 가람 배치를 중심으로 동남축으로 가람을 전개하여 금당 후면 강당지 까지 회랑으로 둘러싸인 거돈사지는 삼국시대 고식의 가람배치형식을 지닌 절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중문지를 지나면 세운 3층 석탑이 있고 바로 뒤에 기단위에 초석이 있고 정면5칸 측면 3칸의 금당터가 있고, 강당지는 초석은 없고 터만 남아 있다. 이 금당은 거돈사의 중심 건물로, 초석의 배열간격으로 보아 중심에 있는 어칸의 길이가 협칸보다 길게 되어 있고 평면 중앙부에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상 대좌가 있다. 대좌에 초석이 있고 그 밑에 적심석이 있다. 그리고 사방에 지대석을 돌린 것으로 보아 불상은 이미 금당이 짓기 전에 먼저 불상을 조성한 후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크기가 일반 단층목조 건축으로는 불상 높이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2층 내지는 3층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금당의 뒤로 낮은 석축이 쌓아 있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강당지로 추정된다. 금당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축 오른편으로 많은 건물지가 있고 절 뒤편 약한 언덕 위에 지금은 경복궁에 옮겨져 있는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서로 근접해 있어야 할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는 절의 오른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다. 왼쪽 회랑지 끝에 이 절터 발굴에서 나온 각종 석재들이 모여져 있다. 거돈사지는 1968년 2만4천7백 86㎡의 터가 문화재보호구역(사적 제168호)으로 지정되어 1982년부터 토지매입을 시작했다. 91년까지 10여년에 걸쳐 한림대박물관이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벌인 후, 1차로 7천5백평의 사역을 정비하였다.
절도, 승려도 없는 폐사지는 빈터지만 폐허라 부르지 않는다. 외려 '공(空)의 극치'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폐사지 답사가 '절집 답사의 고급 과정'으로 '답사객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이라 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폐사지가 3000여 곳, 문화재로 지도에 이름을 올린 경우만 약 100곳에 이른다.
거돈사지원공국사탑비
1025년(현종 16), 고려시대 원공국사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비
절터의 동쪽에 위치한 탑비로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 지종(智宗, 930∼1018)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져 있다. 이 비석의 글은 최충(崔冲)이 지었고, 글씨는 구양순체로 김거웅(金巨雄)이 썼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원래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居頓寺址 圓空國師勝妙塔 : 보물 제190호)은 절터 뒤편에 있었으나 현재는 경복궁 내에 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는 강원도 원주시 거돈사지에 있는, 고려의 고승 원공국사(930년~1018년)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78호이다. 최충이 비문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써서 1025년(현종 16년)에 세웠다. 거돈사지에는 원공국사의 사리탑(보물 제190호)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귀부의 거북머리가 용머리처럼 변화하였는데 양쪽 귀 뒤가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되어 있다. 귀갑문 안에는 사자와 연꽃무늬가 교대로 장식되어 있다. 비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위에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싸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높이가 499.7cm, 비신의 폭은 123.8cm이며 고려 초 조각예술의 높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로 270)
보물 제190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은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고려시대 초기의 고승 원공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다. 건립연대는 원공국사탑비가 고려 현종 16년(1025년)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볼 때 역시 그 무렵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불법 반출되어 일본 사람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긴 것이다. 탑비와 이 부도탑의 지대석이 거돈사지의 원위치에 그대로 있다.
거돈사지 금당터와 불상의 좌대
불상의 좌대
거돈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750호
거돈사지 삼층석탑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석탑이 탑신(塔身)으로 올린 형태를 보면 형식적으로는 신라 양식을 보이나, 세부적인 수법과 모습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초층 기단은 두단의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네모진 면석을 탱주석 없이 한줄로 세워 벽을 만들었다. 그속에 흙과 잡석을 체워 판축으로 지반을 다진 다음 면석위에 외벌대 지대석으로 마감하여 기단을 조성했다. 그 위에 석탑과 직접 연결된 기단을 세웠는데 2벌의 지대석을 쌓은 다음 긴 장방형의 면석을 4개 세우고 4조각의 기단 받침석을 포개올려 탑신 자체의 기단을 조성했다. 그런 다음 남·북쪽에 무늬없는 면석을 세우고 동·서면에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탱주석을 조각한 면석을 끼워 맞추고 사춤한 방식으로 석탑 자체 기단을 조성했다. 이탑은 탑신과 각층의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탱주가 조각되어 있을분이며 옥개석 하부는 방형의 밑받침이 점차 커지면서 5단의 밑받침으로 옥개석 하부의 경사면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이 만드는 처마곡은 거의 직선으로 보이나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있는 통일신라 양식이다.
탑의 상륜부는 사각형 노반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어 놓았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면석에 탱주의 새김, 2단의 갑석과 3단의 옥개석등으로 미루어볼 때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거돈사지의 1000년 느티나무
거돈사지는 문막 IC나 원주 시가지에서 섬강을 지나고 남한강을 거슬러 이른다. 동쪽에 정산저수지가 있어 과거 사찰 앞까지 배가 드나들었음을 부연한다. 사찰 아래 옛 정산분교에 당간지주가 있어 그 영역을 가늠한다.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석축과 수령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다. 고찰은 4~5m 옹벽 위에 지어 길에서 보이지 않고, 남서쪽 석축 위의 느티나무만 가지를 내려 인사한다. 고목은 뿌리가 석축 사이를 파고들어 마치 돌을 움켜쥔 듯하다. '돌을 먹고 사는 나무'라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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