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꽃길/임형신

浮石 2018. 11. 13. 06:00

 

 

 

 

지워진 꽃길/임형신

꽃무늬 벽지를 사러 지물포에 들렀더니 종이 벽지
대신 두꺼운 갈포벽지를 내놓는다 책상머리에서
막막할 때마다 벽지에 난 꽃길을 바라보다 따라 걷던
상상의 길이 없어졌다

푸른 그늘의 길에서는 편백나무 숲도 길러내던 굵은
마디의 손이 일손을 놓고 여위어간다

촉촉이 물기를 머금었던 방이 마른 꽃잎으로 덮이고
길들은 하나씩 문을 닫는다

지물포에서 살아 숨 쉬던 초배지나 장판지도 이제
인조의 질긴 모노륨에 자리를 내주었다

햇볕 좋은 가을날 풀을 쑤어 아내와 마주 잡고 길을
내던 풋풋한 꽃무늬 벽지의 길은 더 이상 낼 수가
없다

끊긴 꽃길 건너편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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