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다 신사는 헤이안 시대인 757년에 세워진 후쿠오카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로 불로장생과 상업번성의 신을 봉안하고 있다. 후쿠오카의 대표적인 축제인「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오이야마(야마카사를 메고 달림)의 출발 지점이다.
하카타의 수호신으로‘오쿠시다상’이라는 애칭으로 많은 시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신사. 제신은 오하타누시노 미코토(구시다궁), 아마테라스 스메오카미(다이진궁), 스사노오노 미코토(기온궁)이다.757년(나라 시대) 제 46대 일왕인 고켄왕의 통치 시절.
이 구시다신사는 이세 마쓰사카에 있던 구시다 신사를 권진한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하카타를 부흥하기 위해 현재의 신전을 건립하여 금품을 기부하였다.
이 신사에 봉납된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하카타의 여름을 대표하는 축제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신사 내에는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구시다 은행나무’의 뿌리에 2개의 몽고 주춧돌이 놓여져 있다.
테즈미야(手水舍)
신사 참배자가 깨끗히 손을 씻고 입을 헹굴수 있도록 물을 받아둔 곳이다.
영천학의 우물(霊泉鶴の 井户)
신사 본전 땅 밑에서 솟아나 신령스럽다고 믿는 샘물, 영천학(靈泉鶴)의 샘물.
이 샘물 한 모금은 자신의 불로장수, 두 모금은 가족의 불로장수, 세 모금을 마시면 친척과 친구의 불로장수가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물에 철분이 함유되어 있는지 온천수 같은 비린 맛이 난다.
신사의 본전 처마 아래에는 큰 동아줄인 시메나와(しめなわ, 注連繩)가 육중하게 꼬여 있다. 이 동아줄은 사람과 신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고, 그 아래에서 참배자들이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리고 있다. 참배자들은 신전의 헌금함에 헌금하고, 길고 두꺼운 줄을 흔들어 종을 친 후 2배를 한다. 종은 흔들릴 때마다 신사에 은은한 종소리를 퍼뜨리고 있다. 참배자는 다시 박수를 2번 치고 마지막으로 1배를 한다.
은행나무
구시다 신사는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축제 ‘하카타 기온야마카사’의 주요 행사를 진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오이야마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이 행진은 770년 전 가마쿠라 막부 시기 하카타 일대를 고통에 빠뜨렸던 전염병 퇴치를 기원하며 시작된 것이라 한다. 대형 장식 가마인 카자리야마가 전시되어 있는데 높이가 10m나 된다.
대형 장식 가마 카자리야마
하카타 기온야마가사(博多祇園山笠)
1241년 하카타에 크게 퍼진 돌림병을 퇴치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재미있는 속설이 하나 있다.
BC 500년경 일본에 진출한 우리나라 가야족 중 가장 큰 세력이 야마국이었다. ‘가사’는 ‘가자’라는 고대 한국어로 ‘ㅈ’이 ‘ㅅ’으로 발음된 것이다. 즉, 야마가사는 ‘야마의 나라로 가자’이다. 우리나라를 떠나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축제를 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 중 하나는 야마가사의 한자 ‘山笠’이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이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博多祇園山笠)는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매년 7월 1일에서 15일까지 개최되는 민속 축제로, 구시다신사(櫛田神社, 헤이안 시대인 757년에 세워진 신사로 후쿠오카 하카타 역 근처에 위치)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펼치는 제례 행사다. 1241년에 처음 시작한 이래 770년 넘게 이어진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후쿠오카 지역 최대 축제이자 일본의 주요무형민속문화재다.
1241년에 처음 시작된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당시 하카타(博多, 규슈 북부 하카타 만에 접해있던 항구 도시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에 인접한 후쿠오카 지역과 합병되면서 현재의 후쿠오카 시가 되었다)에 역병이 돌자 조텐지(承天寺, 1242년 하카타에 창건된 사찰)의 개조인 쇼이치(聖一) 국사가 가마를 타고 길에 물을 뿌려 병을 물리쳤다는 데서 비롯했다. 이 전설에서 국사가 탄 가마로부터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에 등장하는 커다란 가마인 야마카사(山笠, 신을 모신 장식가마)가 유래했다.
이후 전국시대(戰國時代,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중앙정부의 권위가 무너지고 전국 각지에서 지역국가가 일어나 서로 다투던 내란 시대)에 여러 차례 전쟁을 거치며 폐허로 변한 하카타는 1590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의 명에 따라 재건되면서 ‘나가레’(流)라고 하는 7개 자치조직으로 구분돼 정리됐다. 이후 각 나가레마다 야마카사를 제작해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각각의 야마카사는 일본 역사상 유명한 무사나 중국의 왕, 힌두교의 여신 등 다양한 인물을 형상화해 장식한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의 주요 행사는 높이 15미터, 무게 1톤에 달하는 커다란 야마카사를 여러 사람들이 메고 약 5킬로미터의 코스를 달리는 오이야마(追い山)로, 축제의 마지막 날인 7월 15일 새벽 4시 59분에 시작된다. 축제가 시작된 초기에는 야마카사를 메고 천천히 거리를 돌던 것이 1687년 경쟁 관계에 있던 두 마을의 청년들이 서로 지지 않으려고 가마를 짊어지고 빠르게 달린 것이 오이야마로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하카타(博多)는 옛 후쿠오카 지역의 이름으로 에도 막부(江戶幕府, 1603~1867)의 쇄국(鎖国) 정책이 시작되기 이전까지 하카타는 중국 및 한반도와 무역하는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후쿠오카’와 ‘하카타’는 원래 다른 도시로, 후쿠오카는 에도시대에 뒤늦게 건설되었다. 오늘날 후쿠오카 시 중심부를 흐르는 나카(那珂)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후쿠오카는 정치, 문화의 도시로 발전해왔고 동쪽에 있는 하카타는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이후 1889년 후쿠오카와 하카타가 통합되면서 후쿠오카 시가 되었다. 현재 하카타 구에 옛 지명이 남아있는데, 하카타 구는 후쿠오카 현청 소재지이자 후쿠오카 시의 교통 중심지다. 이곳에 있는 JR 철도역과 항구 역시 ‘하카타역’과 ‘하카타항’이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에도 당시 하카타의 지명이 남아있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에서 ‘기온’은 축제를 주관하는 구시다신사(櫛田神社)에서 모시는 신인 ‘고즈텐노’(牛頭天王, 역병 퇴치의 신으로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라고도 한다)를 일컫는 말이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교토 야사카진자를 중심으로 열리는 교토 기온 마츠리와 마찬가지로 역병을 다스리는 신인 고즈텐노를 숭배하는 기온 신앙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야마카사’(山笠)는 신을 모시는 가마를 가리키는 말로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에는 오이야마 때 메고 달리는 가키야마카사(かき山笠)와 화려하게 장식하여 전시하는 가자리야마카사(飾り山笠)가 선보인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에 의해 세워진 가마쿠라 막부가 권력을 잡은 무신정권 시대)에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덥고 습한 여름에 역병이 발생하는 일이 잦았는데, 1241년 하카타 지역에 역병이 크게 돌았을 때 송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쇼이치(聖一) 국사가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쇼이치는 1242년 하카타 지역에 조텐지(承天寺, 쇼이치 국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수력으로 돌리는 제분기를 가져온 뒤로 일본에서 우동과 소바 같은 국수 음식이 발전했다고 하며, 조텐지에는 ‘우동과 메밀국수의 발상지’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를 창시하기도 한 유명한 승려다.
쇼이치 국사는 1241년 하카타 지역에 역병이 창궐하자 세가키다나(施餓鬼棚)라는 가마를 타고서 길에 감로수를 뿌리며 역병이 물러가기를 기도하고, 연고자 없이 사망한 외로운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그러자 역병이 그쳤다고 한다. 그가 탄 커다란 가마를 서민들이 짊어지고 거리를 돈 것이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의 기원이 되었다. 역병을 물리치는 의미를 담은 까닭에 역병을 다스리는 신을 모시는 구시다신사(櫛田神社)를 중심으로 축제가 이어졌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이후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를 거쳐 전국시대(戰國時代, 15세기 후반~16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하카타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당시 하카타는 대륙 무역의 기지로 전국 다이묘(大名, 일본의 헤이안 시대부터 전국 시대까지의 무사)와 호족들이 쟁탈하고자 한 요충지였다. 그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아 하카타 거리는 폐허로 변했다.
전국시대 말 정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황폐해진 하카타의 부흥을 지시했고, 1587년 하카타의 구획을 정리하는 도시계획인 ‘다이코마치와리’(太閤町割り)를 시행해 오늘날 하카타의 원형을 만들었다. 구획 정리로 인해 하카타는 ‘나가레’(流)라고 불리는 총 일곱 개의 자치조직으로 구분됐으며, 각 나가레마다 야마카사를 하나씩 제작했다.
초기의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높이가 1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가마를 메고 천천히 거리를 도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다. 『구시다신사 연람』(櫛田社鑑)에 따르면 1687년 사이가 좋지 않던 두 마을의 청년들이 여름 축제 때 서로 지지 않으려고 가마를 메고 달렸는데, 이것이 호평을 받아 ‘오이야마’(追い山, 가마를 메고 달리는 축제 최대의 행사)로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거리에 전신주가 생겨나 야마카사가 전선줄에 걸리는 등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생기자 높은 야마카사는 전시용으로 제작하고, 오이야마를 위한 가마는 높이를 낮춰 따로 제작하게 되었다. 오이야마 때 사용하는 메는 가마를 가키야마카사(かき山笠), 전시용 가마를 가자리야마카사(飾り山笠)라 한다.
전통적으로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에는 여자들은 참가할 수 없으며 남자들만 가마를 멜 수 있었다. 가마를 지는 사람들을 ‘가키테’(舁き手)라고 부르는데, 이는 ‘메다’라는 의미의 ‘가쿠’(舁く)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전에는 가키테들이 대기하는 장소에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말 것’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 ‘부정한 자’는 상(喪) 중인 사람과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2003년 이후로는 성차별이라는 이유로 이런 표지판을 세우지 않게 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가키테들은 주로 남자들이어서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남자들의 마츠리”라고도 불린다.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의 주요 행사는 신을 모신 가마를 메고 후쿠오카의 거리를 달리는 오이야마(追い山)다. 이를 위해 각 나가레마다 준비한 가마에 7월 7일 이전에 ‘신’을 앉혀 가마를 신격화하고, 7월 9일부터는 참가자 전원이 모여 신사에 참배하며 축제 기간 동안의 안전을 기원한다. 그리고 7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가마를 메고 이동한다. 비로소 가마가 시민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이후 각 나가레의 야마카사들이 오전이나 오후에 자기 지역을 돌기도 하고, 예정된 행진에 앞서 연습으로 거리를 달리기도 하며 축제의 흥을 돋운다. 축제는 7월 15일 오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1) 오이야마카사나라시(追い山笠ならし)
7월 12일 오후에 펼쳐지는 오이야마카사나라시는 7월 15일에 있을 축제의 하이라이트 오이야마(追い山)를 앞두고 진행하는 총연습이다. 실제 오이야마 때 진행하는 거리보다 짧은 구간을 가볍게 달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2) 오이야마(追い山)
오이야마는 축제 마지막 날인 7월 15일 새벽 4시 59분에 나가레 별로 제작한 무게 1톤 가량의 가마를 짊어지고 약 5킬로미터 코스를 달리는 경연이다. 이때 사용되는 가마를 ‘가키야마카사’(かき山笠)라고 한다. 구시다신사에서 5분 간격으로 출발한 야마카사는 코스를 따라 진행하는데, 3백 명이 넘는 남성들이 교대로 가마를 메고 달리는 이 행사는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 최고의 하이라이트다.
가키야마카사를 메는 남자들, 즉 가키테의 복장은 처음에는 ‘시메코미’(締込み)라는 속옷만 두른 알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에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서 메이지 정부는 알몸을 다 드러내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에 ‘핫피’(法被)라는 웃옷을 입어 몸을 가리게 되었으나, 오늘날에도 오이야마 때 시메코미 차림으로 행렬하기도 한다.
야마카사가 거리를 달릴 때 땀과 열기로 달아오른 사람들의 몸을 식히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길가에서 가키테들을 향해 ‘키오이미즈’(勢い水, 기세를 돋우는 물이라는 뜻)라는 물을 뿌려준다. 또한 야마카사의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왓쇼이’(ワッショイ)라는 독특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특징이다.
대형장식가마 카자리야마
① 가키야마카사(かき山笠)
오이야마 때 가키테들이 메고 달리는 가마를 ‘가키야마카사’라고 부르는데, 거대하고 무거운 가키야마카사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다. 현재 일곱 개의 나가레(구역)마다 가키야마카사를 한 대씩 갖추고 있다. 가마를 메는 가키테 역시 각 나가레 별로 지원을 받아 참여한다. 일곱 개의 나가레는 각각의 주제에 맞춰 매년 다르게 가키야마카사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2013년 축제를 위해 각 나가레에서 제작한 가키야마카사는 다음과 같다.
· 에비스 나가레(恵比須流)
에비스 나가레의 가키야마카사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중기의 전설적인 무사 와타나베노 츠나(渡辺綱, 953~1025)를 형상화했다. 와타나베노 츠나는 미나모토 요리미츠(源頼光, 948~1021, 헤이안 시대 중기의 무장이자 귀족으로 ‘라이코우’(らいこう)라는 음독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를 섬긴 ‘요리미츠 4천왕’(와타나베노 츠나 외에 사카다 긴토키(坂田金時, 956~1012), 우스이 사다미츠(碓井貞光, 954~1021), 우라베 스에다케(卜部季武, 950~1022)가 있다) 중 하나로, 무용이 높은 것으로 유명해 여러 전설을 남긴 인물이다.
· 도이 나가레(土居流)
도이 나가레의 가키야마카사는 에도막부 말기의 다이묘(大名)이자 정치가인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1836~93)를 형상화했다.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는 1862년 고메이 천황(孝明天皇, 1831~67)의 신뢰를 얻어 교토 수호직에 취임했다. 취임 후 로시구미(浪士組)라는 조직을 만들어 교토의 치안을 다스렸으며 죽을 때까지 에도막부를 보좌하는 중심인물로서 막부와 운명을 같이했다.
· 다이코쿠 나가레(大黒流)
다이코쿠 나가레의 가키야마카사는 창술이 뛰어났던 전국시대 말의 유명한 무장 모리 타베에(母里太兵衛, 1556~1615)를 형상화했다. 모리 타베에에 대해서는 유명한 대신창(大身槍, 창날이 70센티미터 이상인 긴 창)인 니혼고(日本号)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다 노부나가의 손을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니혼고’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 명기를 나중에 가신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1624)가 하사 받아 지니고 있었는데, 후쿠시마가 큰 사발에 가득 채운 술을 모리 타베에가 단숨에 들이켜 그 창을 받았다고 한다.
· 히가시 나가레(東流)
히가시 나가레의 가키야마카사는 인도 힌두교에서 유래한 일본 불교의 신 벤자이텐(弁財天 혹은 弁才天)을 형상화했다. 벤자이텐은 예능, 학예, 지혜의 여신으로, 비파를 안고 있는 모습은 음악과 기예를 상징한다. 또한 부정한 것을 없애고, 부와 명예, 결혼과 후손에 은총을 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 나카스 나가레(中洲流)
나카스 나가레의 가키야마카사는 전국시대의 최고 명장인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1497~1571)를 형상화했다. 모리 모토나리는 용의주도한 책략으로 승리를 이끌어 낸 희대의 책략가로서 명성이 높다. 또한 그는 ‘세 화살의 교훈’(三矢之訓)으로 유명한데, 그가 세 아들을 불러 화살을 하나씩 꺾어보게 하자 다들 쉽게 화살을 부러뜨렸다. 이어 화살 세 개를 한번에 꺾어보라고 했으나 꺾지 못하자 이처럼 너희 셋이 마음을 합치면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며 훈육했다는 이야기다.
· 니시 나가레(西流)
니시 나가레의 가키야마카사는 중국 전국시대(6세기경) 북제(北齊, 550~577, 한족화한 선비족 고씨(高氏)가 건국한 왕조)의 문양왕의 넷째 아들이자 장수인 난릉왕(蘭陵王, 541~573, 이름은 고장공(高長恭)이며 나릉왕(羅陵王)이라고도 한다)을 형상화했다. 난릉왕은 여자보다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적에게 무시 당하지 않도록 출정 시에는 반드시 사나운 가면을 썼다고 전해진다. 가마의 인형 역시 가면을 쓴 모습이다.
· 치요 나가레(千代流)
치요 나가레의 가키야마카사는 전국시대 무장 마에다 케이지로(前田慶次郎, 1543~1612)를 형상화했다. 그는 창을 잘 다루는 맹장이었으나 권력과 지위, 명예를 바라지 않고 동료와의 신의를 존중한 무사로 존경 받고 있다.
② 가자리야마카사(飾り山笠)
가자리야마카사는 메고 이동하는 가키야마카사와 달리 움직이지 않고 전시하는 장식용 가마로, 초기에는 높이가 15미터에 달했으나 오늘날에는 10미터 전후의 크기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축제 기간인 7월 1일부터 15일 밤 12시까지 하카타 지역의 정해진 장소 14곳에 전시된다. 구시다신사(櫛田神社)를 향해 있는 쪽이 ‘앞’(表, 오모테)이고, 뒤쪽은 ‘미오쿠리’(見送り)라고 부른다. 앞에는 화려한 무사 인형들을 배치하며, 뒤에는 동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소재를 얻은 것들로 장식한다.
원래는 야마카사의 종류가 하나였지만, 메이지 시대 말기에 야마카사가 너무 높아서 전선에 걸린다는 이유로 장식용의 높은 가마(가자리야마)와 높이를 낮춘 경주용 가마(가키야마)를 구분하여 만들게 됐다.
역석(力石)
후쿠오카현의 문화재로 지정된 힘돌, 돌 위에 사람 이름이 쓰여 있는데, 이 돌을 든 스모선수들의 이름이다. 예로부터 스모 선수들이 큰 돌을 몸 위에 들어 올려 힘자랑을 했는데 그 힘돌들을 이 신사에 바친 것이다.
이 힘돌의 문화는 여몽연합군이 규슈를 공격하였을 당시에 군함의 닻으로 썼다고 알려진 닻돌이 이 신사에 전해진 데에서 유래한다.
스모선수로서 괴력을 자랑한 장사였던 도비우메(飛梅)가 61세의 나이였던 1830년에 바친 힘돌과 함께 2010년까지 요코즈나(横綱)였던 아사쇼류 아키노리(あさしょうりゅう あきのり)가 바친 돌도 있다.
역석 앞에는 아무나 시범적으로 들어볼 수 있는 시석(試石)이 있어 개인의 힘자랑을 할 수 있다.
일본 전통 사케통(술통)
축제 또는 봉납통술(신에게 바치는 술)로 쓰이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술통도 몇 개 있다.
일본식 청주(사케)는 1883년에 후쿠다라는 일본인이 부산에 청주공장을 세우면서 들어왔다. 이후 여러 곳에 일본식 청주 양조장이 생겨 여러가지 제품이 만들어졌다..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신사로 하카타에서 가장 큰 축제인 기온야마가사가 행해지는 곳. 현지인들에게는 친숙한 곳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아픈 곳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시 일본인 낭인에 의해 사용된 칼인 히젠도(肥前刀)가 비공개로 보관되어 있다. 이 사건을 주도한 낭인 도우 가쓰아키가 13년간 고통과 후회의 시간을 보내다 1908년 명성황후를 형상화해서 만든 관음상과 함께 칼을 이 신사에 바쳤다고 한다.
이 칼은 길이 120cm, 칼날 90cm이며, 칼집에는 을미사변의 작전명으로 알려진 여우사냥에서 따온 듯한 단칼에 늙은 여우를 찌르다(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또 이곳에는 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고 적힌 문서도 보관 되어 있다고 한다.
신사 옆의 하카타 역사관에서는 마쓰리에 관련된 자료와 기온야마가사 중 설치된 대형 장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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