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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함께 30년' 서예가 구본혁씨

浮石 2018. 11. 24. 19:20


반평생 결실 古비석 탁본 700점 연구용 기증한 구본혁씨


돌도 늙는다. 천년을 넘게 가는 석비(石碑)도 종국에는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음각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탁본이 중요하다. 한데 옛 탁본은 비석의 일부분만 담은 것이 적지 않다. 탁본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작업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사료로서 한계도 있다. 21세기에는 21세기의 탁본이 필요한 이유다.





19일 한국학중앙연구원(경기 성남시) 장서각에서 만난 구본혁 씨(70)의 얼굴에는 햇볕이 남긴 검붉은 시간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30년 넘게 산과 들로 전국의 고비(古碑)를 찾아다니며 탁본을 했고, 그 결과물인 탁본 700여 점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최근 기증했다. 

구 씨는 황해 옹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조부모의 등에 업혀 피란했다. 조부모는 능성 구씨 일가가 있는 충남 보령 청라면에 터를 잡고 산자락 아래 돌밭을 일궜다. 구 씨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구해 온 서첩으로 서예를 배웠다. 인근에서 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났다. 26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서실(서예교습소) 강사로 취직했다가 이내 동대문구 이문동에 서실을 차렸다.

1975년 어느 날 고향 어른이 산중에서 동춘당 송준길(1606∼1672) 필적의 비석을 발견했다며 탁본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솜방망이로 먹물을 찍어 살짝 두드릴 때마다 종이에 글자가 한자 한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주말마다 비를 벗 삼아 살았다. 처음에는 그도 명인의 필적을 찾았지만 5년가량 지나자 역사적 가치가 있는 비석을 모두 탁본해 사료집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생겼다.

도굴꾼이나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찰이 쫓아온 일도 적지 않았다. 비석이 있는 절 주지 스님의 탁본 허락이 안 떨어지면 몇 년 뒤 새로운 주지 스님에게 허락을 받았다. 비석에 먹물 한 방울 남지 않는 그의 솜씨와 정성을 본 주지 스님이 다른 절에 소개장을 써주기도 했다. 서가협회전에서 특선도 했지만 작품 활동보다 탁본이 더 좋았다. 서실에서 번 돈은 족족 전국을 누비는 활동비로 들어갔다. 하루는 주머니가 빈 걸 안 아내가 큰아이를 들쳐 업고 나가더니 어딘가에서 돈을 빌려왔다. “이거 가지고 다녀와요.” 탁본의 장첩(粧帖)도 거의 아내가 만들었다.

그렇게 비석 500여 기의 탁본 700여 점이 탄생했다. 반평생을 바친 결과물이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전통시대 탁본에 비할 수 없이 뛰어난 선본(善本)으로 사료적 가치가 월등하다”고 평가했다. 

 

구 씨는 기존 비문 판독의 오류 등을 지적한 ‘한국석비고찰(韓國石碑考察)’을 2005년 자비로 내기도 했다. “정부나 산하기관이 발간한 국보도록, 문화재대관 등에 건비연대를 비롯해 잘못된 정보가 오늘날까지도 수두룩합니다. 비석에는 분명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판독을 안 했거나 못 해서, 일제강점기 편찬된 ‘조선금석총람’이 잘못 기재한 것을 확인 없이 그대로 따른 탓입니다.” 

구 씨는 “중요한 옛 비석이 비각이 없어 비바람을 맞거나, 몰상식한 관광객들이 던진 돌에 훼손된 걸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며 “후학들이 탁본 자료를 잘 연구해 역사를 올바로 밝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연구원 심의를 거쳐 학술 자료집으로 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