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하회마을 북촌댁

浮石 2006. 5. 8. 16:33

 

 


풍산 류씨들의 집성촌인 하회마을에서 품격 높은 고택이 북촌댁이다. 정식 당호는 화경당(和敬堂)이 맞다. 대지 1700평에 72칸의 한옥으로서, 칸수로만 따진다면 하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저택이기도 하다. 재산은 3000석.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대에서 7대 200년간 부와 명예를 누리던 집이다. 화경당의 품격은 세 군데의 사랑채에서 나타난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북촌유거(北村幽居), 아버지가 거처하던 화경당, 손자가 거처하던 수신와(須愼窩)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 큰사랑인 ‘북촌유거’의 누마루에 앉아서 주변을 바라보면 하회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이다. 동쪽으로는 화산이 들어오고, 북쪽에는 부용대와 강물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남산이 마주친다.

 

이 집이 안동에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859년 여름에 발생한 홍수 때문이었다. 하회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사람을 싣고 마을로 건너오던 배가 뒤집힌 사건이었다. 상갓집에 조문갔다 오던 사람들 수십 명이 탄 배가 불어난 물살로 인하여 전복되었던 것이다. 발생 시각은 어두컴컴한 저녁 시간. 가로등이나 손전등이 없던 시절. 마침 강변에는 잘 말려진 춘양목이 몽땅 쌓여 있었다. 당시 경상도 도사를 지냈던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이 집을 짓기 위해 3년 전부터 애지중지 건조시켜 오던 귀한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구명보트 대신으로 강물에 던져 넣었다. 나머지 목재들도 불을 밝히기 위한 화목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류도성은 어렵사리 춘양목을 다시 구해서 3년 동안 말린 후에야 집을 지었고, 이 소문이 주변에 퍼졌다.

 

뿐만 아니라 이 집안은 소작료를 싸게 받았다. 다른 부자들이 6할을 받았지만 이 집에서는 5할을 받았고,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4할만 받기도 하였다. 그 적선 공덕은 난리가 났을 때 빛을 발하였다. 부자들을 공격하던 동학군이었지만, 북촌댁에 와서는 정중하게 인사만 나누고 지나갈 정도였다. ‘내셔널 트러스트’와 함께 문화유산 보존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후손 류세호(53)씨. 류씨는 선대의 그 공덕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술회한다. 부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나라가 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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