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향해 가는 낙동강 본류는 몸뚱아 리를 구부렸다 폈다 태극을 그리면서 남후면과 풍천면을 휘 감아나간다.
이 낙동강이 감아나가는 서쪽지역이 안동의 평야지역으로 넉 넉한 낙동강이 이루어낸 충적평야인 풍산들이다. 산지가 대 부분인 그 사이에 비좁게 논밭이 들어선 이 지역에서 풍산들 처럼 넓고 평평한 땅은 보기 어렵다. 그래서 옛부터 하회사 람들은 "풍산 들보다 더 넓은 들은 없다"고 여겼거니와 풍산 들이 있기에 하회마을이 으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이닐 듯 하다.
하회는 풍산에서 안으로 돌어간 곳에 있다. 남쪽으로만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잠시 동북쪽으로 선회하여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아 안고 산은 물을 얼싸안은 곳에 터잡은 마 을이다. 마을을 둘러싼 주변의 산수는 동북으로 마을의 주산인 꽂뫼, 곧 花山이 든든히 뒤를 받치고, 남쪽은 花川을 사이에 두고 영양의 일월산에서 그맥이 흘러온 남산을 마주하고, 서 쪽으로는 같은 일월산의 지맥인 원지산이 자리하고 있다. 북 쪽에는 강 건너 벼랑처럼 우뚝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보는 부 용대가 있으며, 동쪽은 영양, 청송과 통한다. 무엇보다도 긴 타원 지형에 지리잡은 마을을 낙동강이 감싸 흐르니, 이러한 형국을 두고 태극형 자리 또는 山太極水太極이라고한다. 이 렇게 물이 돌아나간다고 해서 "물돌이동"이라 하고, 한자로 는 河回라고 이름 붙였다.
옛부터 背山臨水를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명당으로 친다. 그 런 눈으로 볼 때, 물이 삼면으로 휘감아 흐르고, 바로 마을 가까이에 큰들이 있는 것도 아닌, 물로 뒤를 닫힌 막다른 골 목 같은 이러한 자리는 마을 자리로 그리 적합한 형태는 아 니다. 그러나 하회는 오히려 이러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蓮花浮水形, 즉 연꽃이 물 위에 뜬 형상처럼 아름답다고 하 여 특별한 길지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이중환은 " 택리지"에서, 시냇가에 있고 큰 고개에서 멀지 않아 평시에 나 난시에 오래살 수 있는 곳으로 도산과 함께 하회를 제일 로 꼽기도 했다. 또한 땅 모양 자체는 배 모양 즉 "행주형" 이므로 마을에 돌을 쌓으면 배에 돌을 가득 싣는 것과 같다 고 하여 이곳은 돌담을 쌓지 않는 관습이 있다. 마을에 우물 을 파지 않고 물을 하천에서 양수기로 끌어다 쓰는데 이 역 시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나서 가라앉게 되기 때문이란다 . 또한 건너 부용대에서 하회마을을 바라보면 마치 자루가 달린 옛날 다리미 같다고 하여 "다리미형"이라고도 한다.
하회마을은 현재 풍산 류씨들이 모여 사는 동족마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풍산 류씨는 안동의 씨족 가운데 손꼽히는 명문대가이다. 임진왜란때의 명재상 류성룡과 그 형이 류운 룡, 아들인 류진 등을 배출한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그 래서 본래의 "풍산 류씨"보다는 하회 출신을 특화시켜 "하회 류씨"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 말에는 하회류씨들의 강한 자 부심이 배어 있다.
하회가 처음부터 류씨 마을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회 마을 역사를 이르는 단적인 말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야야기가 있다. 김해 허씨가 마을을 처음 개척 하고 광주 안씨가 뒤이어 일가을 이루었으며 풍산 류씨는 그 앞에서 잔치판을 벌일 정도로 가문이 성하게 되었다는 말이 다. 그러나 세 성씨가 잡았던 터는 하회 안에서도 서로 좀 다르다. 고려 말 하회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허씨들은 화산 남쪽 기슭의 거묵실골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뒤이어 들어 온 안씨는 화산 북쪽 기슭인 행개골에 삶터를 이루었다. 고 려 시대의 지방관리인 吏族인 풍산 류씨는 상리에 대대로 살 고 있었는데, 류운룡과 류성룡의 6대조인 전서공 류종혜 대 에 길지를 찾아 지금의 하회로 이주하였다. 이미 허씨와 안 씨가 전통적으로 마을 입지로서 적당한 화산 기슭에 자리 잡 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피해 낮은 지역인 지금의 하회에 터를 닦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풍수에 밝은 地師의 조언에 따라, 이미 3대 전부터 마을 밖 큰길가에 정자를 짓고 자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 을 베풀었고, 류종혜 대에도 마을 큰고개 밖에 정자를 짓고 3년동안 마을 사람들과 나그네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등 공덕을 쌓은 뒤에야 이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공덕으로 인심을 얻어 기존 집단의 승인을 받는 절차였을 것이다. 그 공덕 덕분인지 풍산 류씨는 조선 중기 이후에 인물이 여럿 나서 마을 중심이 류씨 쪽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허씨와 안 씨는 점차 세가 약해져서 마을을 떠나게 되어 18세기 이후에는 오로지 류씨 동족마을로 남게 되었다.
마을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예전에는 남촌댁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웃하회"에 집들이 즐비했었다고 한다. 웃하회는 강에서도 비교적 떨어 져있고 화산 자락의 논들에 가까워 살기에 더 편한 곳이다. 남촌댁의 가세가 약화되자 그 일가와 권속들도 약하게 되어 웃하회가 점차 줄어들었다. 지금은 논밭으로 많이 바뀌었고 교회까지 들어와 있으나 밭둑의 감나무들이 예전에는 집터였 음을 말해준다. 마을을 둘러볼 때에는 마을의 외곽을 두른 방천둑으로 전체 지형과 지세를 살펴본 뒤에 마을 안으로 들 어서서 골목골목을 살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주요한 살림집들로는 대종택이자 류중영과 류운룡을 불천위 로 모시는 양진당이 있고, 류운룡 의 아우인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소종택인 충효당이 있으 며, 그밖에 하동고택, 북촌댁, 남촌댁 등도 있다. 양반가옥 의 전형을 이루는 이 집들 가운데에는 보물로 지정된 곳이 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이 아홉이나 된다. 기와집이 즐비한 가운데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는데 이는 종가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이나 소작인들이 살던 살림집이다.
마을 중심길을 벗어나면 느티나무 세 그루가 둑에 기대 있어 넉넉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나게 되는 솔숲은 강가를 빙 들러 꽤 우거져 있어 여름에도 해가 잘 들지 않는다. 이 萬松亭 숲은 마을의 서단부에 위치하여 풍수적으로는 수구막이 기능을 하나 실질적으로는 방풍, 방 수재, 방사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 솔밭에는 여름에는 야영객들에게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강건너 절벽 또한 아주 수려하다.
하회에는 두 가지 민속놀이가 전한다. 하나는 유명한 하회탈 춤이고 다른 하나는 선유줄불놀이이다. 탈놀이가 탈을 쓰고 양반을 풍자하는 백성들의 놀이라면, 선유줄불놀이는 달 밝은 밤에 강물에 불꽃을 띄워 밝히고 배를 타고 즐기는 양반들 의 놀이이다.
정임당 류길이 류성룡의 부친인 풍산부원군 류중영의 집을 노래한 "河回圖詩"를 읊으며 하는 뱃놀이의 풍류는 다른 곳 에서 맛보기 어려운 것이다.
강 건너에는 한적하고 경관이 좋은 곳을 골라 공부하는 공간 을 두었다. 부용대에서 좀 떨어져 동쪽에 있는 것이 花川書堂이다. 1786년에 겸암 류운룡 을 받들기 위해 지은 건물로 원래는 서원이었다. 부용대 바로 아래에 있는 玉淵精舍는 서 애 류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은 정자이다. 낙향하여 머물러 있을 때에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한 곳이다. 부 용대 서쪽 아래에는 謙菴精舍가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로 지정된 이곳은 겸암 류운룡이 1567년에 세워 도학을 연구 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현판 중 앞면의 것은 퇴계 이황 의 글씨이다.
遠志精舍는 마을 어귀에 있다. 류성룡이 벼슬에서 잠시 물러 났을 때인 1576년에 지은 정자로 중요민속자료 제85호이다. 그 서쪽으로 賓淵精舍가 있다. 강에서 가장 가까운데다 맞은 편에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으니 경관으로 치면 가장 좋은 자리이다. 중요민속자료 제86호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길을 따라 하동고택, 남촌댁, 양진당, 충 효당 순으로 찾아갈 수 있다. 큰길에서 좀 벗어나 골목을 따 라 들어가면 북촌댁도 있다. 이처럼 밀집된 공간에서 집들이 서로 어깨를 어떻게 겯고 있나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하회마을은 산골짜기 사이에 펼쳐진 마을이 아니고 가운데가 불룩 솟은 지세에다가 타원형의 지형에 자리잡은 마을이기 때문에 흔히 집들이 남향으로 잡는 일반적인 좌향을 하지 않 았다. 그것은 길이 방사상으로 나 있고, 집들이 서로 마주보 이는 것을 피해서이기도 하고, 집의 한쪽이 낮아야 배수가 용이한 때문이기도 하다. 길에서 대문이 보이지 않는 집이 많고 골목을 에돌아야 대문에 이르는 집도 많다.
골목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아무래도 담이다. 하회에서 돌 담을 쌓지 않기에 대신 흙담을 쌓는다. 요즘에는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더러 돌담을 쌓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전통을 모르거나 무시한 것이다. 하회에서 흙담을 쌓는 방법은 좀 특이하다. 널빤지로 틀을 만들고 그 사이에 진흙, 돌, 지푸라 기, 석회 등을 넣어서 굳힌 다음 판장을 떼어내어 담을 만드 는데 이것을 "판담"이라고 한다. 또는 흙뭉치를 일정한 크 기로 다듬어 굳힌 흙별돌을 차곡차곡 쌓은 흙벽토담도 볼 수 있다. 흙담이기 때문에 비가 올때 젖거나 쓸려 나려가지 말 라고 담에 기와지붕을 이는 것도 특징이다.
마을 중앙에는 수령 600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삼신당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하회는 다른 마을보다 동신을 모시는 당이 많아 5개나 된다. 화산 중턱에 서낭당이 있고. 화산 자락의 묘지와 논들 사이에 국사당이 있다. 서낭당의 당신은 탈을 깍던 허도령을 였보던 처녀인데 실제로 당시 17세였던 의성 김씨 처녀였다고 한다. 국사당의 당신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몽진하여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공민왕이 아 니었나 여겨진다. 이 당들은 화산 중턱과 자락, 마을의 중심이 지 혈의 응결점에 놓여 있다. 그밖의 마을 동구의 큰고개와 작은 고개에 돌을 쌓고 성황당으로 모셔 마을의 액을 막는 골맥이로 삼았는데 찻길이 크게 난 이제는 거의 모셔지지 않는다. 이 당들에 해마다 정월 보름과 4월 초파일에 동제를 올리면서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것은 하나의 지역공동체로 서 하회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다.
1988년에 민속마을로 지정된 뒤로 관광객의 발길이 더욱 잦 아지자 마을 입구에 큰 주차장을 두어 차량이 마을 안까지 들어가지 못하도록 관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음식점도 없었고 기념품점은 마을 초입에 하나 있 었을 뿐인데 이젠 음식을 파는 집도 꽤 생기고 자그마한 기 념품 가게도 곳곳에 있다. 관광객이나 답사객들을 위한 큰 안내판 그림이 입구에 있고, 하회 주민 한 분이 나서서 더러 재미있는 얘기도 섞어가며 하회마을에 대해 소개해 준다. 이러한 친절은 관광객들이 사람 사는 집을 "구경" 한다는 명 목으로 그침없이 기웃거리는 것을 막으려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구경 그 자체를 위한 "민속촌"이 아니고 여염집들이니 만큼 행동거지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회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에 는 현재 120여호가 있고 약 290명이 산다. 그러나 젊은이들 이 돈 벌러 혹은 공부하러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은 다른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찾는 이는 많아도 마을 의 인구는 점차 줄고 있으며, 따라서 빈집도 간간이 생겨난 다. 관광객이 느는 것보다도 마을사람들이 일상을 잘 영위하 는 것이 하회가 마을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일 것이 다.
출처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역음. 경북북부(답사여행의 길잡이 10). 돌베개, 1997.
안동하회마을 / 임재해 글, 김수남 사진. 대원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