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이름의 유래
이석리(二石里)의 地名은 돌석(石)字가 둘이어서 큰 돌이 두개가 있어서 생긴 이름 같지만 전혀 다른 뜻이다. 1914년 일제 强占期에 行政區域을 개편하기 전까지는 석호동(石滸洞)과 석림동(石林洞)으로 2개 마을이 따로 法定里를 이루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마을을 합하여 석호동(石湖洞)의 石字와 석림동(石林洞)의 石字를 따서 石字가 두개라는 뜻으로 이석리(二石里)라고 이름 하였다.
이 마을은 원래 퇴촌면(退村面)에 속하였으나, 팔당댐이 생기면서, 남종면의 면세(面勢)가 너무도 위축되어 1972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남종면(南終面)으로 이속(移屬) 되었다.
석림동은 일설에 의하면 당초에는 성림(聖林)이었으나, 朝鮮朝 高宗의 號가 聖林이어서, 王位에 오른 후 감히 왕의 號와 같은 마을 이름이 외람되다고 하여 돌석(石), 수풀 림(林)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위치와 지형
이 마을은 43번국도 중부면 상번천리에서 퇴촌면 도마리를 지나 팔당댐 방면으로 가다가 첫 번째 닿은 마을이다. 마을 앞은 팔당호이고 뒤로는 검단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용마산이 마을 뒤에 있어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말하는 배산임수형(背山臨水형(形)의 전형이다. 팔당호가 생기면서 대부분의 농경지는 수몰되었고, 지금은 농경지는 아주 미미한 편이다.
마을의 연혁
이 마을은 석림(石林)과 정지꾸미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 졌는데, 예로부터 漢江에서 고기를 낚아 생활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어 비교적 풍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팔당호가 생기면서 내수면어업(內水面漁業)도 안 되고, 농사도 농경지가 별로 없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어느 성씨(姓氏)가 처음 입향(入鄕)하여 마을을 이루었는지 분명한 기록이나 설화가 없어 알 수가 없다.
석 림(石林)
이석리의 중심마을이다. 예전에 성림(聖林)이라고 하기도 하였다는데, 그것보다도 이 마을이 돌도 많고, 나무도 많아 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마을에는 廣州市 보호수 제37호인 수령 300여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보호수 제40호인 수령 27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같은 장소에 제41호 느티나무도 있다.
이 마을 뒤 조리봉 밑에는 조선 肅宗代의 文臣으로 羅州牧使를 역임한 龍仁李씨 이하악(李河岳)의 묘가 있다.
정지꾸미
예전에 길이 뚤리기 전에는 이곳에서 배를 이용하여 서울도 가고, 분원으로도 나가곤 하였는데, 정지꾸미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예전에 壬辰倭亂때 忠州 達川江에서 殉節한 신립장군(申砬將軍)의 집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 마을은 팔당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이어서 도시민들의 별장이 있고, 지금은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조리봉
산봉우리가 마치 조리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봉우리의 높이는 230m 정도이나 그 밑에는 바위굴이 있는데, 굴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방 한 칸 정도의 넓이가 된다고 한다.
뒷골
이 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용마산
이 마을 뒤에 가장 높은 산으로 검단산(黔丹山) 줄기이다. 용마산 정상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린 골짜기가 있는데, 장사골 이라고 한다. 이곳에 바위가 있는데, 예전에 어느 壯士가 바위를 주먹으로 내려쳐서 그 바위에는 지금도 주먹 자국이 있다고 한다.
중 골
용마산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를 말한다.
출처 :makeLink("광주"); 광주
이석리(二石里)의 地名은 돌석(石)字가 둘이어서 큰 돌이 두개가 있어서 생긴 이름 같지만 전혀 다른 뜻이다. 1914년 일제 强占期에 行政區域을 개편하기 전까지는 석호동(石滸洞)과 석림동(石林洞)으로 2개 마을이 따로 法定里를 이루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마을을 합하여 석호동(石湖洞)의 石字와 석림동(石林洞)의 石字를 따서 石字가 두개라는 뜻으로 이석리(二石里)라고 이름 하였다.
이 마을은 원래 퇴촌면(退村面)에 속하였으나, 팔당댐이 생기면서, 남종면의 면세(面勢)가 너무도 위축되어 1972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남종면(南終面)으로 이속(移屬) 되었다.
석림동은 일설에 의하면 당초에는 성림(聖林)이었으나, 朝鮮朝 高宗의 號가 聖林이어서, 王位에 오른 후 감히 왕의 號와 같은 마을 이름이 외람되다고 하여 돌석(石), 수풀 림(林)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위치와 지형
이 마을은 43번국도 중부면 상번천리에서 퇴촌면 도마리를 지나 팔당댐 방면으로 가다가 첫 번째 닿은 마을이다. 마을 앞은 팔당호이고 뒤로는 검단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용마산이 마을 뒤에 있어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말하는 배산임수형(背山臨水형(形)의 전형이다. 팔당호가 생기면서 대부분의 농경지는 수몰되었고, 지금은 농경지는 아주 미미한 편이다.
마을의 연혁
이 마을은 석림(石林)과 정지꾸미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 졌는데, 예로부터 漢江에서 고기를 낚아 생활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어 비교적 풍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팔당호가 생기면서 내수면어업(內水面漁業)도 안 되고, 농사도 농경지가 별로 없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어느 성씨(姓氏)가 처음 입향(入鄕)하여 마을을 이루었는지 분명한 기록이나 설화가 없어 알 수가 없다.
석 림(石林)
이석리의 중심마을이다. 예전에 성림(聖林)이라고 하기도 하였다는데, 그것보다도 이 마을이 돌도 많고, 나무도 많아 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마을에는 廣州市 보호수 제37호인 수령 300여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보호수 제40호인 수령 27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같은 장소에 제41호 느티나무도 있다.
이 마을 뒤 조리봉 밑에는 조선 肅宗代의 文臣으로 羅州牧使를 역임한 龍仁李씨 이하악(李河岳)의 묘가 있다.
정지꾸미
예전에 길이 뚤리기 전에는 이곳에서 배를 이용하여 서울도 가고, 분원으로도 나가곤 하였는데, 정지꾸미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예전에 壬辰倭亂때 忠州 達川江에서 殉節한 신립장군(申砬將軍)의 집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 마을은 팔당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이어서 도시민들의 별장이 있고, 지금은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조리봉
산봉우리가 마치 조리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봉우리의 높이는 230m 정도이나 그 밑에는 바위굴이 있는데, 굴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방 한 칸 정도의 넓이가 된다고 한다.
뒷골
이 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용마산
이 마을 뒤에 가장 높은 산으로 검단산(黔丹山) 줄기이다. 용마산 정상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린 골짜기가 있는데, 장사골 이라고 한다. 이곳에 바위가 있는데, 예전에 어느 壯士가 바위를 주먹으로 내려쳐서 그 바위에는 지금도 주먹 자국이 있다고 한다.
중 골
용마산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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