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리
게으른 해가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잔다 가끔 골짜기에 갇혀 길을 잃는다 냉이꽃이
땅을 움켜쥐고 있는 비탈밭 키 재기를 하고 놀던 돌들이 발 소리에 놀라 뿔뿔이 달
아난다
물안개 떠 있는 언덕은 숨어서 외우는 주문처럼 나직한 집 몇채 따개비마냥 업고
있다
언제부턴가 모란은 혼자 웃고 있다
뒤꼍에 졸고 있던 꽃들이 풍경소리에 놀라 깬다 수런거리다가 방울방울 피 흘리며
능선을 기어오른다 풍경소리 온산을 깨우고 마른뼈들 꽃으로 일어나 잠시 숨을 돌
리다 이내 등성이 너머로 몸을 숨긴다
비어 있다
꽃들이 지나 간 자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이 닫힌다 우박이 다녀간 해맑은 아침 널부러진 푸성
귀 찢긴 귓바퀴에 햇살 한줌 화인(火印)처럼 박혀 있다
임형신
피노리(避老里): 동학농민전쟁에서 패한 전봉준장군이 숨어 들다 피체된 순창
국사봉 아래 있는 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