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
명옥헌 현판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1673년(헌종14년)에 바위에 적은 글씨를 옮겨 만든것이라고하며, 물소리가 구슬에 부딪쳐나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명옥헌(鳴玉軒) 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삼고(三顧)라고 쓰여진 현판은 후한 말엽에 유비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세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초빙한데서 유래한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온 말로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연못
연못속의 배롱나무는 벌써 단풍이 들고 있다..
배롱나무(목백일홍)
연못 주위에 약 20주의 베롱나무(목백일홍)가 심어져 있고, 수령은 100여년 정도 되었다고 하며, 8월, 9월에는 활짝 핀 목백일홍(紫微花)이 명옥헌의 풍광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고 한다..
연못안의 배롱나무는 단풍이 들고있는데, 아직도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11년 10월 12일 촬영)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
서로 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더불어 한 잔 하리라' 라는 성삼문의 싯구에서 보듯 한여름을 수 놓는 그 처연한 붉은빛은 참으로 곱다.
배롱나무의 줄기는 미끈하다. 손톱으로 살살 긁어주면 나무 전체가 흔들리어 마치 간지럼타는 것 같다고 하여 간지럼나무라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무줄기의 매끄러움 때문에 여인의 나신(裸身)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옛날부터 대갓집 마당에는 심지 않았다. 또한 나신의 배롱나무를 어머니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어머니가 가진 모든 것을 오직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다 내어주고 빈 몸둥아리만 남은 어머니의 사랑을 배롱나무로 표현하였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절과 선비들이 머무르는 곳에 많은 배롱나무를 심었다. 그 이유는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은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라는 뜻에서 절 마당에 주로 심었고, 선비들은 청렴을 강조하기 위해 정자나 향교, 서원 등에 많이 심었다.
오희도(吳希道, 1583-1623).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
160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였다.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檢閱)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오희도(吳希道)의 넷째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 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바 장계정(藏溪亭)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여 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 등이 심어져 뛰어난 조경으로 알려졌으며,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또는 뒤편에 도장사(道藏祠)라는 사당에 있으므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부른다.
명옥헌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전(前)의 지당부는 명옥헌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고저차는 약 6.3m이다. 동서너비 약 20m, 남북길이 약 40m 크기를 갖는 방지의 중심부는 원형의 섬이 있으며 주위에 약 20주의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수령은 100여 년 정도이다. 명옥헌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당(池塘)은 동서 16m, 남북 11m 크기이다. 이 지당은 1979년 여름에 조사 발굴된 것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계류의 물을 끌어 채운 것으로 북과 서쪽에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실의 구성은 외부로 툇간을 돌리고 그 중앙에 실을 둔 중앙실형(中央室形)이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다.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두었다.
글 : 담양군 문화관광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