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平,旌 이야기

정선아라리 흥얼거리며 겨울 '동강'에 가다

浮石 2007. 5. 13. 05:13
겨울 언 동강을 맨발로 걸어보지 못한 이,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마라

 

-->
▲ 동강할미꽃, 동강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식물이다.
ⓒ 강기희
휴일을 맞아 길을 떠난다. 굳이 먼 길을 떠나지 않아도 내 속을 풀어놓을 곳은 많다. 동강으로 간다. 동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서러웠던 때가 있었다.

몇 해 전, 그때도 그랬다. 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원인 모를 서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애당초 근원이 있는 서러움은 아니었다. 그 '근원없음'이 길 떠난 사람을 더 서럽게 만들었다.

오후의 햇살은 눈부시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떨어진 햇살은 파편처럼 동강 변으로 부서져 내린다. 눈이라도 멀 것 같은 동강의 오후는 고요하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없다면 꾸역꾸역 올라오는 서러움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강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광하리에서 시작된다. 천천히 차를 몰아 동강으로 간다. 동강 매표소를 지나면 거대한 석회암 절벽이 나타난다. 정선에서는 절벽을 '뼝때'라고 부른다.

절벽은 그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고개를 꺾는다 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절벽엔 봄이면 동강할미꽃이 핀다. 보통의 할미꽃보다 색이 짙고 강하다.

겨울 동강 변엔 할미꽃은 없고 할아버지의 수염이 가득하다. 동강의 봄을 할미꽃이 지킨다면 겨울엔 할아버지들의 수염이 동강을 지킨다.

▲ 동강할미꽃 서식지에 할아버지 수염이 달려있다.
ⓒ 강기희
언뜻 보아도 할아버지의 수염은 수백은 되어 보인다. 장관이다. 이름도 변변하게 붙어져 있지 않은 것들이다. 고작 붙여졌다는 게 황색초다. 그마저도 대단한 발전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풀이라고 부를 뿐이다.

차를 천천히 몬다. 응달엔 눈이 그대로다. 얼음 낀 동강은 또 다른 풍경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다. '겨울 언 동강을 맨발로 걸어보지 못한 이는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마라'라고.

인생에 대해 논하고 싶은 이는 반드시 동강의 언 강을 맨발로 걸어봐야 한다. 거친 눈보라가 치는 날이 제격이다.

물가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청둥오리들을 만난다. 열댓 마리 정도 된다. 가끔 눈에 띄던 원앙은 보이지 않는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자 다들 날아오른다.

청둥오리들은 강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강 건너편 모래톱에 앉는다. 지켜보는 인간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귤암리에서 잠시 쉬어간다. 귤암리엔 감나무가 많다.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은 여태 남아 있다. 박새인지, 참새인지 작은 새 몇 마리가 나무에서 재잘댄다. 그 소리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보다 청아하다.

정선아라리 가사 보면, 담배 농사하는 집에 딸 시집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 예전 뗏꾼들이 즐겨 찾았던 주막집 터. 겨울이라 문을 닫았다.
ⓒ 강기희
담배 건조막이 동강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건조막은 붉은 황토로 만들어졌다. 담배와 고추 등을 말리는 곳이다. 정선아라리 가사에 보면 담배 농사하는 집에 딸 시집 보내지 말라는 가사가 있다. 담배 농사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다리를 넘는다. 강변에 집 한 채가 있다. '강변상회'란 간판이 붙어있다. 오래전이면 뗏목꾼들이 들락거렸을 위치다. 겨울을 맞은 강변상회는 굳게 닫혀있다. 예전의 뗏꾼들은 주막에 들러 걸쭉한 막걸리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릉 아저씨 찔릉 조카야 불고지 동서 아니냐
속곳 벗고 달려드는데 골낼 놈이 누구냐

아저씨 나쁜 건 경상도 아저씨
맛보라고 조금 줬더니 볼 적마다 달라네

- '정선아라리' 가사 중에서


뗏꾼들은 주모와 정선아라리를 주고받으며 고단한 몸을 쉬게 했다. 당시 뗏꾼들이 받는 돈이 군수 월급보다 많았다니 주막집에서는 큰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떼돈' 벌었다는 말이 그런 연유로 생겨났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옷바위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작은 옷을 걸친 바위가 있다. 지금은 작은 바위지만 옛날엔 높이 10m나 되는 거대한 바위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무명을 파는 장사꾼이 바위에 무명짐을 올려놓고 쉬어 가려 하니 무명짐이 떨어지지 않았단다.

그 꼴이 하도 이상해 무명을 한 자 끊어 바위에 놓았더니 짐보따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 장사가 잘되어 부자가 되었다는 옛날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흘러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바위에 옷을 입히고 제를 올리니 마을에 우환도 사라지고 농사도 잘되었단다.

▲ 여행길에서 만난 소,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걸쳤다.
ⓒ 강기희
옷바위로 가는 길은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천천히 계곡을 따라 오른다. 띄엄띄엄 나타나는 집들이 반갑다. 양지에서 햇살을 받고 있는 소를 만난다.

소는 추위 때문인지 움직임이 둔하다. 소 옆에는 토종닭 두 마리가 먹이를 찾아 땅을 파헤치고 있다. 주인은 소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산촌에서 소는 식구와 다름없다. 올봄 비탈진 밭을 가는 것도 소다.

소가 없으면 농사짓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비탈진 밭은 트랙터도 오르지 못한다. 소가 아니면 사람이 소 대신 밭을 갈아야 한다. 그 일을 해보면 소의 고마움을 비로소 알게 된다.

정선읍 오반리에 사는 지아무개씨는 매년 봄 소 밭갈이를 나선다. 소 밭갈이에 관한 한 이 지역에서 선수다. 정선에서 그를 따라올 이가 하나도 없다. 소를 다루는데도 특별한 기술이 있어 지역의 밭갈이를 도맡아 한다.

그는 매년 봄 한 철 소 밭갈이만으로 한 해를 먹고산다. 그만큼 품값이 세고 일감도 많다. 일감이 많다는 것은 정선지역에 비탈진 밭이 많다는 얘기다. 정선 지역에서 소 밭갈이를 할 때 부르는 소리를 보자.

이라----
화소야---
어--서--가--자--
해는 야----
떨어지는데 부지런히 가---자
어디 여차 싹 돌아서라

- '소 밭갈이' 할 때 부르는 소리


봄 이팝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비탈진 밭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밭에 따라서 한 마리가 가는 경우도 있고 두 마리가 쟁기를 끄는 경우도 있다.

▲ 동강으로 햇살이 부서져내린다.
ⓒ 강기희
옷바위 마을을 나와 가수리로 간다. 동강의 푸른 물은 우측에서 흐른다. 속도를 조금 더 줄이면 물의 흐름과 함께 할 수 있다. 가수리에 가면 큰 느티나무를 먼저 만난다. 여름철이면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이 매우 크다.

학교 건물의 부재는 단순히 건물 하나가 사라지는데 그치지 않는다

가수리는 아쉬움이 많은 마을이다. 예전 가수리 초등학교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 각 방송사의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던 곳인데, 몇 해 전 새 학교 건물이 들어서면서 헐렸다.

학교 건물의 부재는 단순히 건물 하나가 사라지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 시절의 문화와 삶이 고스란히 사라지는 것과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학교를 지키던 느티나무는 오랜 친구를 잃었다.

반드시 학교를 헐어야 했을까. 의문이 강하게 남는다. 학교를 헐고 난 후 마당엔 오래전 아이들이 즐겨 먹던 과자 봉지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뽀빠이', '자야' 등의 과자는 예전 가장 인기 있는 과자였다.

학교가 사라지면서 그 시절의 추억은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혔다. 시절 하나 묻히는 건 잠시 잠깐이다. 며칠 마실 다녀오면 집 한 채가 사라지고 지어지는 게 요즘이다.

여행객은 가수리의 물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동강의 아름다움이야 예전과 다름없지만 변해가는 주변 풍경은 여행객의 마음을 더없이 쓸쓸하게 만든다.

▲ 동강, 겨울 동강을 맨발로 걷지 못한 자는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마라!
ⓒ 강기희

2007-01-15 13:44
ⓒ 2007 OhmyNews

'寧,平,旌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심이의 한  (0) 2007.05.16
동강할멈 강물이너무 더럽지 않아?  (0) 2007.05.13
단종 국장(國葬)  (0) 2007.05.02
단종문화제 열기로 `후끈'  (0) 2007.04.25
삼척 새천년도로  (0) 2007.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