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문(仁政門:보물813호)
인정문(仁政門:보물813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813호.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처음 창건된 것은 1405년(태종 5)으로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 이 건물도 1744년(영조 20)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연소되어 좌우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에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정면 기단 중앙에 건물 어간(御間)과 같은 너비의 계단을 두었다. 사방에 평주를 돌리고 가운데에 두 개의 고주를 세워 고주 사이에 두 짝의 판문(板門)을 달았었으나, 현재는 개조되어 있다.
공포는 내이출목·외이출목으로 3제공이 중첩되고 도리받침 부재는 구름모양으로 깎았다. 내부는 2제공까지는 첨차 끝이 직각으로 절단되고, 그 위는 둥글둥글한 운궁(雲宮)이 되어 도리와 보를 받치고 있다. 고주 위로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종보를 두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서까래와 가구를 노출시켰다.
지붕에는 양성한 각 마루에 취두·용두·잡상을 두고 용마루의 양성 부분에는 3개의 이화무늬[李花文]를 장식하였다. 인정문의 좌우에는 10칸의 행랑이 뻗쳐 있고, 행랑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인정전 좌우의 월랑과 만나게 되어 있다.
이 중 서쪽의 월랑에는 향실(香室)·내삼청(內三廳)이, 동쪽 행랑에는 관광청·육선루·악기고 등이 있었다. 인정문과 주변 행랑은 일제강점기에 일부 개조가 있어서 인정전 출입문을 외벽 어간에 축소하여 설치하고 창호도 모두 개조하였으며 행랑의 벽체에는 왜식을 가미하였다.
이 건물은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이며,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한 곳으로 중요시된다.
인정전(仁政殿:국보225호)
인정전(仁政殿:국보225호)
조선시대 왕들이 창덕궁에 오랜 기간 머물렀었기에, 인정전은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수많은 왕의 즉위식과 왕비의 책봉례가 거행된 것은 물론이고, 연산군대에는 광대들을 동원하여 이곳을 사치와 유희의 공간으로 탈바꿈 시켰다.
임진왜란 때에는 온종일 비가 쏟아지던 날, 선조가 인정전에서 말을 타고 피난길을 나서기도 했다. 인정전에서는 간혹 종친과 노인들을 불러 잔치가 베풀어지기도 했으며,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 광해군이 “인정전에서 전시(殿試)를 누차 거행하여 매우 더러워졌다. 소변을 보는 일 따위를 병조로 하여금 각별히 엄금하게 할 일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라고 전교를 내린 기록은, 과거시험이 치러질 당시 복잡했던 인정전 앞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조선시대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조반정이 벌어진 곳도 인정전이었으며, 1728년(영조 4) 여름에는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평하고 돌아와 이곳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순종대인 1908년 무렵에는 인정전이 서양식으로 개조되어 전등이 걸리고 서양식 커튼과 유리창이 생겼으며, 일제에 의해 용마루에 이화문(李花紋: 오얏꽃 무늬)이 붙여지고 박석이 걷어지고 잔디가 깔리는 등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인정전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들 속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흔히 왕의 즉위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느 시대든 왕의 즉위식은 매우 슬픈 분위기에서 행해진다. 그 이유는 전대의 왕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음 왕의 즉위식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즉위할 왕은 상복을 입고 통곡을 하던 와중에 잠시 면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한 후, 다시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게 된다. 이때, 왕의 즉위식은 보통 문에서 이뤄졌다.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에서는 연산군ㆍ효종ㆍ현종ㆍ숙종ㆍ영조ㆍ순조ㆍ철종ㆍ고종 등 총 8명이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영조실록]을 바탕으로 즉위식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종이 승하하고 6일째 되는 날인 1724년(영조 즉위) 8월 30일. 왕세제(王世弟)인 영조는 상복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시신이 안치된 빈전(殯殿)에 가서 절한 뒤, 보위(寶位)를 받고 내려왔다. 인정문의 동쪽 협문 밖으로 가 그 곳 한복판에 있는 어좌(御座)에 올랐고, 백관(百官)들은 네 번 절하고 ‘천세(千歲)!’를 호창(呼唱)하였다. 이후, 돌아와 면복을 벗고 다시 상복을 입었다. 영조는 이날 즉위식 후, 51년 7개월이라는 최장기 집권을 하게 되었다.
왕의 즉위식뿐만 아니라, 인정전에서는 왕비의 책봉의식과 백관의 하례가 진행되기도 했다. 인정전에서 왕비의 책봉 하례를 받은 인물로는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ㆍ폐비윤씨ㆍ정현왕후,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 경종의 왕비인 선의왕후 등이 있었다. 인현왕후는 퇴출되었다가 다시 왕비의 지위로 회복되었을 때에도 역시 인정전에서 하례를 받는 인연을 가졌다.
인정전은 연산군과도 관계가 깊다. 아버지인 성종이 인정전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 우찬성 손순효(孫舜孝)는 세자였던 연산군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고 임금이 앉은 평상을 만지면서,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성종은 “나는 또한 그것을 알지마는 차마 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손순효의 예상이 맞은 것일까. 실제 연산군은 손순효의 걱정대로 인정전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인정전에 단청을 칠하는데 군사 5백 명을 동원하는가 하면, 청기와를 얹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 때 이세좌(李世佐)가 자신에게 술을 엎지르는 실수를 저지르자 분노하여 그를 국문하게 하였다. 이세좌는 폐비 윤씨가 폐위될 때 극간하지 않고, 그녀에게 사약을 전하였던 사람이었다. 연산군은 인정전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하기도 했다. 또, 영화 ‘왕의 남자’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연산군은 남자 광대와 재주 있는 여자 10명을 모아 인정전 뜰에 대령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결국 반정군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정전은 인조반정과 관련된 공간이기도 하다. 1623년 3월 13일 삼경(밤 11시~새벽 1시)무렵, 반정을 도모한 무리들이 홍제원(弘濟院) 근처로 집결하였다. 반정의 주도세력은 이귀ㆍ이시백ㆍ이시방ㆍ최명길ㆍ장유ㆍ김자점 등 서인들이었었다. 반정 세력들은 세검정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지고, 군사를 이끌어 창의문(彰義門: 서울의 북소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
궐내에 먼저 들어가 반정의 거사를 빨리 결정짓는 것이 급하여 곧바로 인정전에 들어가니, 광해와 폐인(廢人) 지(祉: 광해의 아들)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군병들이 서로 눈을 부라리고 기세를 부려, 칼을 뽑아 기둥을 쳤다. 그리고 외쳐 말하기를, “백성의 고혈을 빨아 이렇게 호화로웠는데, 우리는 이제야 반정을 하게 되었다.”하고, 침전(寢殿)에 난입하여 횃불을 들고 죄인들을 수색할 즈음에 불이 붙어 모든 궁전이 잿더미로 화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연평일기(延平日記)] 임술년(1622)
이때, 광해군을 찾아 다니다가 횃불을 잘못 버려 궁궐 건물이 잇달아 타고 인정전만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반정군의 공격에 놀란 광해군은 황급하게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 갔었다. 인조는 인정전 서쪽 뜰 위에 가서 동쪽을 향하여 호상(胡床)에 앉았다. 미처 대비의 명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남면(南面)의 조회는 받지 못하고, 전폐(殿陛) 아래 있는 높은 상에 앉아 신하들을 보고 있었다. 인조의 즉위식은 창덕궁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인목대비가 있는 경운궁에서 이루어졌다.
인정전은 조선시대 왕의 즉위식과 왕비의 책봉하례가 일상적으로 벌어진 공간이자,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처럼 역사의 물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된 후에는 조선왕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연산군ㆍ효종ㆍ현종ㆍ숙종ㆍ영조ㆍ순조ㆍ철종ㆍ고종 등 총 8명이 즉위식 과정을 떠올리며 인정전의 위엄을 맛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용상과 일월오악도
'서울,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덕궁 여춘문(麗春門) (0) | 2016.07.23 |
---|---|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0) | 2016.07.22 |
창덕궁 숙장문(昌德宮肅章門) (0) | 2016.07.20 |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0) | 2016.07.19 |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0) | 2016.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