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에서/임형신

浮石 2009. 7. 2. 11:48

 

 

 

 

 

폐사지에서
         -그날은                                   
                                                         

                                               임 형 신

 

그날 폐사지 답사는 고달사지에서 시작하여 거돈사지에서 끝났다

가는 곳마다 이름 하나씩 집어주며, 입이 귀에 걸린 마애불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한다

무너진채로 엎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돌탑은 반쯤 일어나서 된 힘을 쓰거나 누워서 뒤집기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내 생일날 수직으로만 올라가는 운일암 등반을 접어두고

수평으로 누워 한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처처불상들, 언제부턴가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숨겨진 하늘로 이끌어내던 나를 보고싶었다

 

목계나루 건너 엄정면 괴동리 億政寺址, 수인처럼 잊혀진 이름 가을햇볕 속에 타고 있었다

땅바닥에 뒹구는 쇠북이 노래가 되어 울음 울 때마다

연못에 던져진 불상들 키 큰 芙蓉의 꽃대 하나씩 밀어 올린다

 

땅속 깊이 매장된 銘文을 눈동자처럼 지켜낸 밤을 지나
한 하늘을 삼켰다 토해낸 선연한 피 흐르는 흙더미 속
천년 웅크리고 있는 이름 되찾은 날
막혔던 물길 열리고
당초무늬 암막새 등에 업혀 가던 물고기떼
잠시 뭍에 내려 숨을 고른다

 

돌미륵 머리에 꽃을 인채 집을 비우고 
처처의 내가 만행 중이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날의 구름
바람
햇볕  숨을 죽이고

    

열린시학 2009년 여름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거차도/임형신  (0) 2009.07.04
풍장/임형신  (0) 2009.07.02
치자 香 /임형신  (0) 2009.06.25
방씨네 소/임형신  (0) 2009.06.24
禪林院 가는 길 /임형신  (0) 2009.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