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리/임형신 피노리 게으른 해가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잔다 가끔 골짜기에 갇혀 길을 잃는다 냉이꽃이 땅을 움켜쥐고 있는 비탈밭 키 재기를 하고 놀던 돌들이 발 소리에 놀라 뿔뿔이 달 아난다 물안개 떠 있는 언덕은 숨어서 외우는 주문처럼 나직한 집 몇채 따개비마냥 업고 있다 언제부턴가 모란은 .. 詩 2010.04.22
햇빛 한 줄기 버려져 있다 /임형신 ▲모운동 폐가 (2005. 11. 13.) 햇빛 한 줄기 버려져 있다 임형신 흙집 한 채 뿌리 뽑혀져 있다 사람이 살기 가장 좋다는 해발 칠백 삼도봉 아래 모운동 골짜기 이랑이랑 쥘 흙 놓아버리고 집 한 채 빈산에 떠있다 해를 넘긴 고랭지 배추밭 허옇게 말라가고 잡초 엉클어진 마당가에 쓰다만 가.. 詩 2010.04.19
사월의 아내 사월의 아내 조 영 환 아내가 봄옷을 정리하다가, 문득 옷장 서랍에서 눈에 익은 꽃무늬 원피스를 꺼낸다 스무 해 전, 그녀와 처음 만났던 사월 어느날 벚나무 그늘에서 머뭇거리며 사랑을 고백하던 날 그녀가 입었던 꽃무늬 원피스 해마다 사월이면 벚나무가 어김없이 내 기억 속에서 홀연히 꺼내 입.. 詩 2010.04.05
층층/황경식 층층 강화도 고려산 積石寺 입구에는 온종일 말없이 엎드린 개 한 마리 있었다 흙빛인가하면 금빛이고 금빛인가하면 먹물이 휙휙 뿌려진듯했다 사납지도 호락하지도 않았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모래더미가 속에 잠든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돌을 삼키면 그런 몸이 되었을까. 핏빛 젖은 .. 詩 2010.04.04
눈1 /황경식 눈1 황경식 하늘로 써 보낸 편지들이다 소풍이라도 나온 듯 재잘거리며 낡은 몽당연필로 마구 點을 찍고 글자를 만들며 두근거리는 외곬 생각을 숨기려 떨어지다가 날아오르고 미친 듯, 금을 긋기도 하는 맹목으로 쏟아지는 저 많은 첫사랑의 말들을 허공의 우체부는 제대로 배달했을까 詩 2010.04.04
희망촌 1길/임형신 희망촌 1길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는 언덕에 희망촌이 있다 상계4동 수원지 아래 철 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산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기울어진 담벼락에 나팔꽃 씩씩거리.. 詩 2010.02.08
길 위에서 /임형신 길 위에서 임형신 유배지 가는 길 하나 살아남아 기다리고 있다 낯 설어라 두리번거리며 투박한 쪽문 열어젖힌 집들 새알처럼 품고 있는 강진만 마량포 지나 회진 가는 길 아직은 절개지에서 생피 흐르지 않는다 뒹구는 막사발 하나 가득 철철 넘치는 단술 받아 마신 동백꽃, 불콰한 황토.. 詩 2010.02.03
번잡림(煩雜林)에 들다/임형신 번잡림(煩雜林)에 들다 중복 건너 말복의 한낮, 불이 물을 에워싸고 그늘을 태우고 있네 후고구려 터에 있는 짚다리골 자연 휴양림, 자연은 어디 가고 피 뚝뚝 듣는 살코기 태우는 사람들 골짜기마다 널려 있네 귀틀집 지워진 자리마다 장시(場市)처럼 들어 앉아 나 번잡림에 들었네 살이 .. 詩 2010.02.03
나는 당신의 초승달입니다 나는 당신의 초승달입니다나는 당신의 태양이 아닙니다나는 당신의 초승달입니다빛은 아니라도 나 홀로 쓸쓸하여 당신의 외로움에 동참하는 여린 초승달입니다나는 당신의 등대가 아닙니다나는 당신의 가로등입니다당신 삶의 목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한 발짝씩 걸어가는 가로등입니다나는 당신.. 詩 2009.12.06
소금꽃/임형신 소금꽃 임형신 한 됫박의 멸치가 한 됫박의 보리쌀을 기다리는 무안군 일로 장터 봄 햇살 노랗게 튀고 있는 난장에 반쯤 눈을 뜨고 졸고 있는 늘그막의 아버지 사흘에 죽 한 모금 먹어도 사람 행실 잘 해야 한다던 서슬퍼런 말씀은 놓은지 오래다 황사 바람 심술부리는 장 모퉁이 일용할 .. 詩 2009.07.06